위 사진은 1930년대 군산부 산수정(군산시 명산동) 유곽(遊廓) 풍경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스물세 명으로 술상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표정이 모두 밝다. 스모 선수 우승을 축하하는 주연(酒宴) 자리로 보이기도 한다. 실내에서 많은 사람이 기념촬영을 한 것으로 미루어, 유곽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쪽 중앙 기둥을 경계로 좌우에 들어선 오시이레(붙박이장)와 도코노마(장식용 공간), 그리고 다양한 풍속화가 그려진 액자와 족자 등이 왜색을 짙게 풍긴다. 화려한 궁중의상 차림의 여성과 관복차림의 남자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흉측스런 모습이 상상되기도.
스모 선수 4~5명이 어여쁜 일본 기생(게이샤)와 어울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게이샤들 목을 감싸고 호기를 부리는 선수도 보인다. 1980년대 한국 씨름계를 평정했던 이만기 선수가 요정에 가서 사진처럼 벗었다면 기생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스모 선수 중 체격이 우람한 중앙의 히슈산(肥州山: 1906~1980)은 일본에서 주니어챔피언(세키와케)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현역시절 신장 180cm에 체중 109kg으로 당시로는 거구였으며, 한때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리키시(力士)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군산부(府)에서도 일본 국기(國技)인 스모 경기가 가끔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을 제공한 ‘도쓰카’씨는 사진 설명문에서 "히슈산은 초창기 군산부청과 군산신사가 있던 군산공원(월명공원) 아래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스모 경기를 수업했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라고 전했다.
스모 선수와 술잔을 건배하는 두 사람 중 검정 기모노 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스포츠형 머리의 남자가 일본에서 사진을 가져온 도쓰카씨 조부(祖父) 되는 군산병원 '나까야마' 원장이다. 그의 취미는 마작, 경마 등이었으며 활달하고 친절해서 조선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거류민단 시절(1903) 군산에 '中山病院(중산병원)'을 개업하고, 1906년 '군산병원'을 인수 합병한 '나까야마'는 훗날 군산부(府) 의원을 지냈다고 한다. 어머니 장례식을 금광사(현 동국사)에서 치렀으며, 해방 후에도 군산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조선 여성들 '인신매매처'였던 '유곽'
다다미가 깔린 바닥의 접시와 맥주병들 그리고 일본 전통악기 샤미선(三味線) 등은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특히 삼색 태극 문양이 들어간 대형 부채가 눈길을 멈추게 한다. 게이샤 중에 조선 여성이 상당수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제가 조선에 처음 유곽을 만들 때는 접대부(게이샤) 모두 일본 여성으로 채워졌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여성이 하나둘씩 늘어 1930년대 들어서는 6대4 비율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처녀들이 팔려가거나 요정에서 빚을 많이 지고 인기가 떨어진 기생들이 유곽으로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명산동 유곽은 일제가 규제를 엄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범죄를 저지르고 달아난 범인의 피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나이 어린 조선 여성들 인신매매처가 되기도 했다. 다음은 소설 줄거리와 당시 신문 보도를 정리한 것이다.
"그 여자는 17세 때 그녀 아버지에 의해 유곽(창녀촌)으로 팔려갔다가 몸값 20원을 10년 동안이나 갚고도 빚이 60원이나 남았는데 병들고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되어, 쓸모가 없어지자 겨우 유곽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일본 집 식모살이를 한다고 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고향(故鄕)> 줄거리에서)
"지난 4일 밤 11시경 군산부 신흥동 유곽 태평각(太平閣)에 일본사람 하나가 들어와 차를 마신 후 그냥 나가는 것을 김향심(19세)이 찻값을 주고 가라니까 돌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향심을 찌르고 도주하는 것을 잡아 군산경찰서에서 문초 중인 바 향심은 다행히 오른손에 경상을 입었을 뿐 큰일은 없다고 한다." (1930년 12월 8일 <동아일보>)
"충남 서천군에 사는 유부녀 황성녀(16세)는 학생들 원족(소풍) 구경을 갔다가 외척 송(宋) 아무개를 만났는데, 김성보란 자와 공모한 송씨는 황씨를 감언이설로 꾀어 군산 유곽에 60원을 받고 팔려다가 발각되자 달아났다고 한다. 송씨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며, 김씨는 자신의 딸들을 모두 군산 유곽에 팔아 낭비한 자라고 한다." (1930년 3월 5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