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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명단 새겨진 비석, 땅에 묻어버렸죠.” 장금도 명인과 돌아본 군산 소화권번과 명월관 자리
글 : 조종안 / chongani@hanmail.net
2016.03.25 10:13:4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봄볕이 따사로웠던 지난 7일(월), 특별한 외출을 했다. 가끔 오가면서 그냥 지나쳤던 군산시 신영동 옛 명월관(明月館) 자리와 일제강점기 소화권번(기생조합) 자리를 돌아본 것. 이 시대 마지막 예기 장금도(89) 명인과 신명숙(장금도 제자) 대진대학교 교수와 동행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소화권번은 장 명인이 예의범절(걸음걸이,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앉음새 등)과 전통 가무(歌舞)를 익힌 기생학교(4년제)였고, 명월관은 놀음(공연)을 나가던 요정이었다.



 

군산의 요정과 권번에 관심을 가지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만난 사람 10명 중 7~8명은 자격시험을 어렵게 통과하고 군산경찰서에서 허가증을 받아 요릿집으로 놀음을 나갔던 권번 출신 예기를 요정의 종업원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군산 소화권번을 ‘명월관의 다른 이름’으로 착각하는가 하면, 성매매가 목적인 일본인 유곽과 은근한 멋으로 술과 전통 기예를 제공했던 명월관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문화 공간 역할도 했던 군산 명월관

 

1950년대 이전에는 손님의 초청으로 기생들의 놀음이 이뤄졌다. 손님이 요정에서 기생 누구를 찾으면 요정은 권번으로 연락한다. 권번에서는 집에서 곱게 화장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기생에게 인력거를 보내 어느 요릿집에서 부른다고 알려준다. 화대도 권번을 통해 받았다. 요즘 연예인들이 단체나 기관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하고 출연료를 받는 형식이었다. 권번이 예기들 매니지먼트회사 역할을 했던 것. 아래는 장금도 명인의 추억담이다.

 

“우리는 권번을 ‘학교’라고 했지, 명월관은 기관장이나 돈 많은 사장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높은 사람이 주로 왔는디 화대(해옷값)를 전표를 받았어. 그 전표가 돈이나 마찬가지였어. 권번에서 전부 수금해서 열흘이나 보름 만에 ‘간표’(현금으로 바꿈)를 하니까 잘 간수만 하면 됐지. 손님에게 별도로 돈(화대)을 받는 일은 없었어. 대신 춤을 잘 추거나 창을 잘하면 수고했다고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30분이나 한 시간을 세 시간이나 열 시간으로 찍어줬지.” 

 

군산의 권번은 1915년경 처음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요정 또한 비슷한 시기에 영업을 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명월관은 군산을 대표했던 1급(갑종) 요릿집으로 조선의 춤과 소리를 좋아하는 일본인 단골도 있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 장교들도 찾아와 조선의 전통 가무를 즐겼다. 일제강점기 명월관은 외지 손님 환영식을 비롯해 지역 유지들 좌담회, 중앙지 기자들 간담회, 단체 및 회사 창립총회와 정기총회 등 문화 공간 역할도 하였다.

 

군산은 1950년대 초 전쟁의 회오리 속에 권번 시대가 막을 내린다. 인력거가 사라지고 외제승용차가 등장한다. 미군 병사와 양공주가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영화동과 중앙로엔 크고 작은 미군 전용 클럽(맥주홀)이 넘쳐난다. 서구화 바람의 범람은 ‘미국사람 똥은 약이 된다’는 말을 만들어 낸다. 양춤 바람이 불면서 요정의 운영 방식도 달라진다. 기생의 높은 출연료에 부담을 느낀 요정들이 화대가 싼 쓰미꾸미(업소에서 거처하는 종업원) 여급(접대부)을 고용한 것.


 

유흥문화가 바뀌면서 장구와 가야금 소리보다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를 선호하는 손님이 늘어난다. 명월관에서도 밴드들이 흘러간 유행가를 연주하고 손님과 여급들이 어울려 양춤을 추는 광경이 흔히 목격된다. 1960년대 후반에는 간판이 ‘연정’으로 바뀐다. 수완이 뛰어난 명월관과 연정 출신 기생들이 독립해 란정(공집), 연희정, 송죽 등을 개업, 호황을 누린다. 신진들에게 밀려난 연정은 1980년대 노래방으로 다시 태어나 오늘에 이른다. 

 

명월관 자리 갔다가 탄식소리만 들어

 

일제강점기 명월관은 동영정(신영동)에 있었다. 부근에는 철공소와 여관이 많았다. 째보선창(죽성포구)과 가까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앞 도로는 소화통이 개설되는 1930년대 초까지 군산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건물 뒤로는 금강으로 유입되는 샛강(일명 세느강)이 흘렀다, 주변 공터에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향나무가 200여 주 심겨 있었고, 그 옆으로 철로(군산역-내항)가 지나갔다. 철길 옆에는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가등정미소가 자리했다.

 

옛 명월관 자리에 도착했다. ‘연정노래타운’이란 간판만 보인다. 높은 시멘트 건물이 사방을 가려 답답하게 느껴진다. 장금도 명인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렵게 얻어낸 답변은 “참나, 큰 방이 열 개나 되는 ‘ㄷ’자 기와집에 정원도 있었는디 왜 이렇게 됐댜!”라는 짤막한 탄식뿐. 탄식은 몇 차례 반복됐다. 그의 탄식에서 구순을 코앞에 둔 할머니 예기의 험난했던 인생행로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한으로 점철된 삶의 애환이 느껴지기도.

 

신명숙 교수는 “3년 전 (장금도)선생님과 왔을 때는 확실한 위치를 몰라 부근만 배회하다 돌아갔었다”며 “오늘은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껏 상상해보고 싶었는데 실망이다. 내가 이렇게 허탈한데 선생님은 오죽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기생질이 아들에게 해될까 봐 일찍이 춤과 인연을 끊고 수십 년을 울타리 안에 숨어 지냈지만, 가슴 구석구석에 새겨진 한스러운 추억까지 지울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하다”고 덧붙였다. 

 

군산 소화권번 기생들, 뛰어만 다녀도 혼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화권번이 자리했던 신영시장(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제 잔재인 나가야(長屋) 건물이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골목길을 따라 걸어간 시간은 5분 남짓. 인파로 넘쳐야 할 재래시장은 생선을 다루는 생선장수 할머니만 한두 명 보일 뿐 행인은 만나기조차 어렵다. 셔터가 굳게 잠겨있는 점포가 많아 그런지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게 다가온다. 이곳은 주상복합지역이었으나 1960년대 중반 시장이 형성됐다.

 

신영시장 입구는 일제강점기 강호정(죽성로)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으로 부근에는 청과물시장(채소 도매시장)을 비롯해 호남농구 주식회사(쌀가마니 짜는 기계 제조회사), 와타나베 제염소(소금 만드는 회사), 군산 동부금융조합, 경마구락부, 안동병원(원장 권태영) 등이 있었다. 시장 입구와 모시전거리(죽성로)를 잇는 골목은 ‘카페 골목’으로 오케이 카페, 올림픽 카페, 오리엔탈 카페, 차이나 카페, 홍콩 카페 등 이국적인 상호의 카페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 군산부 지도에는 시장통 중간쯤에 소화권번이 표기됐다. 지금의 3층 시멘트 건물이다. 주민들도 그렇다고 인정한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권번이 세 개(보성권번, 군산권번, 소화권번) 있었다. 그중 보성권번과 군산권번은 언제 누가 설치했는지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예기들 활동은 1920년대 초부터 신문에 소개된다. 반면 소화권번은 설치 연도(1928)와 권번장 이름(박제호)이 자료에 나타난다. 옛날 신문에도 1930년을 전후해 소개되기 시작한다.    

 

“소화권번은 권번장이 박제호라고 여자였는디 대단했지. 우리가 명월관이나 근화각으로 놀음을 나가면 권번장이 밤늦게까지 시찰을 돌았어. 놀음은 한 번에 2~3명씩 나갔는디. 숨어서 우리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는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거나 치맛말기가 내려올 정도로 자세가 흐트러지면 혼났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도 사푼사푼 조용히 걸어 댕겨야지 뛰어다니면 그것도 혼났응게.. 그리고 그때는 화초기생이니 예기니 그런 게 없었어. 그냥 기생이었지.”

 

땅속에 묻힌 소중한 유물, 하루 빨리 캐내야  

 

이곳 토박이 김영근(80)씨를 만났다. 젊어서부터 군산경찰서에서만 근무하다가 정년퇴직 했다는 김씨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0여 년 전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소화권번 권번장과 기생들 이름이 적힌 돌비석을 발견했다는 것. 그는 그냥 버리려다가 아까워 땅에 묻었다고 했다. 그는 묻어놓은 장소를 알려줄 터이니 따라오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문화재급 유물을 발견했다는 생각과 함께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길 건너 시멘트건물이 소화권번이 있던 자리입니다. 소화권번은 기와를 얹은 2층 목조건물이었죠. 우리 집은 기생 오야지(권번장, 아니면 왕언니)가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담장에는 해마다 넝쿨장미가 피고, 마당에는 장독과 우물이 있었죠. 수돗물이 안 나올 때는 동네 사람들이 길어다 마시던 큰 우물이었어요. 그리고 내가 근무하던 군산경찰서 로터리에서 영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일제 때 인력거차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택시회사였죠.  


 

50년쯤 됐을까. 이 건물, 저 건물(소화권번), 저기 저쪽 건물까지 모두 째보라는 별명을 가진 건축업자가 지었는디, 그때 우리 집도 새로 지으면서 기생 오야지와 기생들 이름이 한자로 쭈~욱 새겨진 회색 돌비석을 발견했죠. 비석에 적어놓은 기생 이름이 한 50명, 60명쯤 될랑가. 하여튼 기생 명단 밑에는 짤막한 글귀가 날짜와 함께 새겨있었어요. 그냥 버리려다가 아까워 땅에 묻어놨죠. 지금 당장에라도 파면 나옵니다.” 

 

처음에는 기생 이름을 일일이 비석에 새긴 이유를 몰라 궁금했다. 그러나 얼마 전 봤던 색 바랜 흑백사진에 적힌 글귀가 떠오르면서 의문이 풀렸다. 1939년 촬영한 소화권번 단체사진 위쪽에 한문으로 ‘주식회사 군산 소화권번 창립 5주년 기념 촬영’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 비석을 캐봐야 자세한 내력을 알겠지만, 주식회사 창립기념일 축하행사의 하나로 대표이사와 주주(기생 및 일반) 명단을 새긴 돌비석을 제작해 세워놓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김영근씨 증언대로 돌비석이 나온다면 보물이나 문화재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다. 땅속에 묻힌 소중한 유물이 밝은 햇빛을 보게 될 그 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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