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옛날 신문에서 만난 일제강점기 군산의 권번과 기생들 (2)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보성권번(普成券番), 군산권번(群山券番), 소화권번(昭和券番) 등 세 개 권번이 존재하였다. 보성권번은 개복정(군산극장 뒤편), 군산권번은 선양동 부근, 소화권번은 동영정(신영동 시장골목)에 있었다. 식민 통치수단의 하나로 설립된 권번은 주식회사의 효시가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교육과 공연이 기획될 수 있었다.
군산 정미노동조합이 개최하는 연주회가 1922년 12월(29일~31일) 군산부 강호정(군산시 죽성동)에 있는 군산좌(군산극장)에서 열렸다. 관객의 뜨거운 열기 속에 사흘 동안 진행된 연주회는 10대~20대 군산 출신 여성들로 구성된 동광단(東光團) 단원들의 신파극과 서울·호남 지역 예기조합 기생들의 가무 공연으로 성황을 이뤘다.
동광단은 1921년 군산에서 창단된 전국 최초 여성 신파극단(新派劇團)으로 전해진다. 초기 임원진은 단장 김춘교(22), 부단장 심화경(21), 간사 김춘자(16) 등으로 서울, 인천, 대전, 평양, 해주 등 전국을 돌며 공연하였다. 단원들이 공연 수익금을 고학생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당시 언론은 그들을 상당한 학식과 새로운 사상을 흡수한 신여성들이라고 평하였다.
1927년 4월 8일 오전 7시 55분 월남 이상재 선생 영구(靈柩)가 열차 편으로 군산역에 도착한다. 그날 영결식에 참여한 단체는 80여 개(외지 포함). 신문은 기차역 광장은 추모 인파로 교통이 끊기고,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연도는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다. 조문객은 2만여 명. 조기(弔旗) 300개, 조문(弔文) 50장에 달하였다. 부의금(총 458원 50전) 명단에는 보성권번 예기들이 낸 20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군산 기생들은 다양한 예술 활동과 더불어 각종 캠페인, 사회 저명인사 장례식 참여, 체육단체 회관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영화상영 우정 출연, 조선인학교 교사(校舍) 신축비용 지원, 이충무공 묘소 추모 성금, 자선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한다. 권번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개인과 단체에 집단으로 대처하거나, 법적 대응도 불사하는 등 주권행사도 활발히 펼쳤다.
중요한 대목은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면서 전통 문화예술이 사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유지 보존하는데 기생들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잦은 공연과 1932년 4월 21일(목요일) 경성방송국에 군산 소화권번 소속 예기 김유앵(金柳鶯)이 출연하여 ‘단가’를 비롯해 ‘심청가’, ‘춘향전’ 등 남도소리를 들려준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쟁과 불황 속에서도 호황 누렸던 군산 소화권번
군산 소화권번(4년제)은 1928년 설립된다. 1932~1933년 소속 예기는 23명. 1930년대 중반 주식회사 체제로 바뀐다. 당시 소화권번은 동기(童妓)들에게 예의범절(걸음걸이,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앉음새 등)과 전통 기예를 가르치고 스케줄(요정 놀음, 극장공연, 화대 계산 등)을 관리해주는 일종의 예기 매니지먼트 회사였다.
1930년대 들어 군산은 매년 불경기였음에도 소화권번은 호황을 누렸다. 예기 23명이 1932년 한 해 동안 올린 화대는 1만 1983원. 당시 권번에서는 화대를 ‘놀음차’ 또는 ‘해옷값’이라 하였다. 기생이 가무로 흥을 돋워주는 대가로 받는 출연료였던 것. 화대는 요릿집 주인이 손님에게 청구하여 받았다. 만약 받지 못하면 권번을 통해 기생에게 갚아줘야 했다. 다음에 손님이 찾으면 또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에는 예기 24명에 화대는 3만2740원이었다. 1938년에는 39명으로 늘었으나 화대는 2만4000원에 그친다. 전년보다 1만 원가량 감소한 것. 1938년 한 해에 화대를 많이 올리고 표창받은 소화권번 예기는 장향옥(1등: 2733원 50전), 김농주(2등: 2233원 50전), 이농옥(3등: 2157원 50전), 전봉옥(4등: 1840원 50전), 최소도(5등: 1429원 50전) 등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총동원령을 내린 1938년. 소화권번은 그해 1월 23일~24일 양일간 시국봉사 특별연주회를 개최한다. 연주회에 출연한 예기들은 행사비용을 제한 수입금 163원 22전을 국방비로 낸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소설 <탁류> 주인공 초봉이 월급이 20원이었고, 서울 유명백화점 숍걸 계봉이는 30원, 정주사가 300원으로 방과 부엌이 딸린 가게를 꾸몄다는 대목을 참고하면 163원의 당시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1938년 이후에는 매월 3일을 예기들 집회일로 정하고 좌담회를 열어 소질향상과 영업개선을 토의하였다. 그해 8월 3일에는 군산경찰서 보안주임이 참석하여 시국 인식을 강조하는 집회를 개최한다. 보안주임은 개정된 영업규약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는 영업시간 엄수와 귀금속품 사용금지를 강조하였고, 전시체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문답식 시험도 치렀다.
권번과 인력거, 1950년대 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광복(1945)을 전후해 군산에는 명월관, 만수장, 동양관(근화각), 천수각 등의 요정이 있었다. 그때는 고급요릿집도 갑종(1급) 허가증이 있어야 권번을 통해 기생을 부를 수 있었다. 건물 규모가 아무리 커도 2급 요릿집은 기생을 부를 수 없었던 것.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릿집 동해루, 쌍성루 등에도 기생을 부를 수 있는 갑종 허가증이 걸려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로 등장했던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는 1942년 다시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군산의 권번은 광복 후에도 계속 운영되다가 한국전쟁(1950~1953)과 함께 문을 내린다. 기생들이 요정으로 놀음 나갈 때 자가용처럼 이용했던 인력거도 비슷한 시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군산 명월관은 1960년대 후반까지 장구와 가야금 소리가 정원 담장을 넘어 들려왔다. 요리상에는 궁중 요리 상징인 신선로가 빠지지 않았다. 과일은 물론 호두, 잣, 은행 등 견과류와 마른오징어 하나도 예쁘게 손질해서 올렸다. 이처럼 근래까지 음식의 맛과 품위가 뛰어났던 것도 100년 전 안순환을 따라갔던 수라간 상궁과 나인들 솜씨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문헌
황미연,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전북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기생 이야기 일제시대의 대중스타>(신현규). 옛날신문(1920~1930년대). 장금도 명인 구술
사진1 잔칫집에서 기념촬영 하는 조선 기생들 1930년대 모습
사진2 동아일보가 보도한 월남 선생 군산 영결식(1927년 4월10일)
자료사진(옛날신문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