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만 살고 있나요? 스물네 살까지 저도 그랬어요.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㊴ ‘들꽃청소년세상’ 활동가 서른 살 최미나
미나씨의 통장 잔액은 자주 ‘0’이 되었다. 그녀 나이 스물여덟 살, 부산의 이모 집에서 신세를 지며 살고 있었다. 물론, 일도 했다. 꼬박꼬박 돈이 나오는 일은 아니었다. 교육박람회에 참여하고, 사교육을 반대하는 지역 모임에 나가고, 교육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불안에 떠는 대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나’를 가늠했다.
어릴 때 미나씨는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 교실로 들어가서 친구들과 있는 걸 두려워하던 유치원생이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친구들이 화나게 해도 따지지 않고 그냥 견뎠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활달해졌다. 밝은 친구들과 어울린 덕분이었다. 밖에서도 큰소리로 웃게 된 그녀는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는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게 많았어요. 두 달쯤 되니까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학교 그만두고 싶다고 했고요. 저는 부모님한테 항상 지지를 받고 산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머니가 말리시는 거예요. ‘잘 하고 있다가 왜 엉뚱한 소리를 해? 좀만 지나면 적응할 거야. 남들도 다 하는 거야’ 하면서요.”
미나씨는 ‘내가 이상한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니까 오후 11시까지 야자를 했다.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일이 많았지만 참아냈다. 학교라는 틀을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주위의 권유대로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새로운 걸 창조하는 건축이나 사람들 삶에 보탬이 되는 특수교육에 흥미를 갖고 있었지만 주장하지 못 했다.
당연하게도 사범대학은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다. 미나씨는 교생실습도 나갔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하는 학생들을 보면 외로워보였다. ‘이 교육 현장에서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임용고시 공부를 했다. 처음 본 시험에서는 떨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시험공부를 1년 더 했다.
“저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만 살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두려워했어요. 임용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맘먹었죠. 대학 다닐 때, 장학금은 받았지만 생활비는 스스로 벌었거든요. 그래서 수학 과외를 했어요. 다른 걸 못 해봤어요.”
스물다섯 살, 미나씨는 카페에서 알바를 했다. 하고 싶던 일이었으니까. 영어회화 공부도 하고, 운동을 해서 살도 빼고, 여행도 갔다. 인형극도 해 봤다. 노인들이 사는 시설에 가서 봉사 활동도 했다. 영아들이 일시적으로 보호받는 센터에 가서 일을 돕고, 지체장애인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곳에서는 일상생활 보조활동을 했다.
“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미나씨는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는 내려놓았다. 어머니와 수 없이 부딪혀도 꿋꿋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며 6개월을 보냈다. 그런 뒤에야 숨고르기를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지?’ 추려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관심이 갔던 건축과 사회복지 분야의 책을 읽었다.
미나씨는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한 사립 고등학교에 6개월 계약직 수학강사로 들어갔다. 면학 분위기를 강조하는 학교였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엎드려서 잤다. 수업시간인데 들락날락 하는 학생도 있었다. 미나씨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시키는 게 힘들었다. 교단에 서 있는 게 외로웠다.
“학교 출근할 때마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아침마다 턱에서 뿌지직 소리가 나면서 반 정도 턱이 빠졌어요. 1-2분 있다가 이를 앙다물면서 집어넣었어요. 울면서요. 학생들한테 강제로 시키는 게 싫은데, 제가 그렇게 사니까 진짜 싫었어요. 사회복지대학원 입학을 앞두고는 학교에서 빠져나왔어요.”
스물여섯 살 미나씨는 김해 인제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생. 가진 돈은 얼마 없었다. ‘수학 과외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때에 학과 교수님이 “상담학회 행정일 하면서 학비 벌래?”라고 제안했다. 미나씨는 학회를 준비하면서 학점에 상관없이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그 일이 좋았다. 가장 큰 도움이 된 수업은 ‘집단 상담’. 함께 모여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들여다봤다. 그걸 얘기하고 푸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도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아동 청소년 분야의 시설로 실습도 나갔다. 양육시설이나 그룹홈은 아이들의 생활 하나하나에 감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인내해야 한다. 항상 반복되는 것 같지만 발전하고 있다는 것, 그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미나씨는 반복하면 금방 소진되는 타입. 진로 고민하고 대학원 공부하면서 2년이 흘렀다.
“지인이 정건희 소장님이 운영하고 있던 ‘청소년 자치연구소’를 소개시켜 줬어요. 마침 청년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모집하시더라고요. 청소년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인 청년들, 방학 두 달 동안 그 고민에 집중할 수 있는 청년들. 조건이 두 가지인데 딱 저잖아요. 전국에서 모집한다니까 신청서를 3주 걸려서 썼어요. 고심했죠.”
2014년 여름, 각각 다른 곳에서 사는 네 명의 청년들과 정건희 소장님은 군산에서 만났다.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더 고민해야 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얘기했다. 그녀는 마음이 정돈됐다. 가장 마음 쓰이는 일반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해 생각했다. 영국의 서머힐 학교처럼 스스로 수업을 선택하고 공부하는 자유학교를 만드는 운동을 하고 싶어졌다.
정건희 소장님은 미나씨에게 경기도 군포에서 활동하는 김지수 선생님을 소개시켜줬다. 김지수 선생님은 그녀에게 “지금의 청소년들이 그런 이상적인 학교를 안 원하면 어떡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정해진 틀에 맞춰서 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 고민하는 게 좋은 친구들도 있을 거라면서. “그런데도 자유학교만이 정답일까요?”라고 물었다.
“껍질 하나를 벗고 나온 기분이었어요. 현실에 있는 청소년을 많이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10년 전에, 제가 청소년이었을 때 원하던 거 말고요. 지금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알고 싶었어요. 운이 좋게도 정건희 소장님이 ‘들꽃청소년세상’ 전북지부를 만드는데 함께 하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작년 2월에 군산으로 아주 왔어요.”
‘들꽃청소년세상’은 서울과 안산에서 활동한다. 그룹홈(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 갈 수 없는 청소년들이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공부함)도 많이 있다. 이동형 청소년 버스, 교육복지센터, 지역아동센터, 쉼터, 대안학교도 있다. 군산은 막 시작하는 단계. 지역의 청소년들이 아무 때나 와서 놀고 쉬고 공부할 수 있는 청소년 자치공간 ‘달그락 달그락’을 마련했다.
‘달그락 달그락’에 온 청소년들은 활동을 다양하게 한다. 기자단 친구들은 취재해서 쓴 글을 ‘새전북신문’에 기고한다. 온라인 게임을 만들고 싶은 친구들은 실제로 게임 만드는 회사가 있는 서울까지 가서 캐릭터와 디자인 만드는 것을 실습한다. 돌아와서는 게임을 만들고 시연해 본다. 창업하고 싶은 친구들은 상품을 만들어서 시장을 연다.
“그래도 청소년들의 진로 고민은 막연해요.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못 만나고, 대학 홈페이지나 인터넷 검색으로만 정보를 아니까요. 저희는 ‘달톡 콘서트’라고 2주에 한 번씩 진로 콘서트를 열어요. 지역에서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와서 강의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