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대야면사무소는 정겹고 아련한 옛 추억이 담긴 사진을 공모한다. 김석근 면장은 “삶의 질 향상과 농촌공동체 회복을 위해 55개 마을 이장으로 구성된 주민자치위원회 중심으로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추억의 사진 수집도 다양한 사업 중 하나라는 것.
김 면장은 “지난 18일 주민과 지역 자생단체 회원 200여 명이 대야농협 2층 회의실에 모여 ‘꿈을 꾸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으로 대야면 발전기금 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며 “주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여유롭고, 보람차고, 당당하고, 신나는 대야면을 만들자’는 의미로 <여보당신> 구호도 만들었다”고 부연한다.
“지난 7월 면장 발령을 받고 와보니 편하게 지내는 어른도 계시지만, 50%가 넘는 주민이 정부 보조를 받아 생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민 모두가 포괄적으로 복지혜택을 받을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다가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 기본계획을 세웠죠.
추억의 사진 공모는 ‘삶의 질 향상’이 첫째 목적으로 해피타운(노인 안마, 찜질방), 커뮤니티센터(취미교실) 등과 함께 주요 사업 중 하나입니다. 수집한 사진들을 광복 이전과 이후로 나눠 건물이 잘 보존되고 있는 대야주조장 2층에 전시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자는 취지이지요.”
김 면장 설명에 따르면 그동안 모은 사진은 70여 점. 구한말(1904) 두루마기 차림의 지경교회 신도들 모습을 비롯해 일제 말 강제징용을 앞둔 신혼부부, 1950년대 전통 혼례식, 농가에서 사용하는 수차(물자세) 제작공장, 소에게 여물 먹이는 농부, 마을 부녀자들 화전놀이, 상갓집 풍경, 양복점, 시계점, 미장원 등 구닥다리 간판이 보이는 1960년대 거리, 기차역 부근 연탄공장 인부들 작업 광경, 1970년대 새마을운동, 88올림픽 성화 봉송, 초등학교 소풍 사진 등 다양하다.
정수영 대야면 발전기금 추진위원장은 “주민들도 한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어른들만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내자는 게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에게도 긍지와 꿈을 키워주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 될 것”이라며 많은 관심과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어른들은 사진 전시장을 돌아보며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고, 어린이들에게는 역사 공부와 함께 애향심을 심어줄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대야면
대야면은 서해안고속도로와 전주-군산 고속화 도로가 지나는 군산의 관문이다. 면소재지는 ‘지경리’에 있다. 인구는 12월 18일 현재 5657명(남:2876명, 여:2830명)으로 10년 전보다 2천여 명이 줄었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 남쪽이 되므로 남삼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 지역 일부를 병합하여 대야면으로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했다가 1995년 도농 통합으로 군산시가 됐다.
대야(大野)라는 지명은 호남평야와 맞닿은 드넓은 들녘에서 유래하였다. 군산 개항(1899) 이전에는 만경강 강심이 백마산 아래까지 이어져 배를 타고 드나들어 ‘배닿을메’(배달메, 배달뫼)라 하였다. 옥구·임피 경계 지역이어서 지경(地境)으로도 불리었다. 기차역도 1912년 3월 군산선(군산-이리) 개통 이후 지경역으로 불리다가 1953년 6월 1일 대야역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군산선은 원래 대야를 경유하여 직선 코스로 회현 용화산을 뚫고 옥산면 남내리 지경장터를 거쳐 군산에 이르도록 측량되었다. 그런데 옥산면 부호(만석꾼)이며 중추참의 직분을 가진 남종구가 철도가 놓이면 자기 선산이 훼손되고 전답이 손상될 것을 예상하고 총독부와 교섭하여 ‘지경장터’ 푯말을 십 리 밖으로 밀어내고 이름을 지경역이라 칭했다고 전한다.
백마산도 민족의 수난사 한 대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을사늑약(1905) 이후 일제가 더 많은 호남평야 쌀 수탈을 위해 지금의 전군도로(전국 최초 2차선 신작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갈마음수(목마른 말이 물을 마심) 명당인 백마의 머리와 허리를 절단하여 산신노호가 발생, 청장년 12명이 명이 검게 타 급사했다는 것. 이를 두고 주민들은 일제가 철도와 도로를 내면서 명산 혈맥을 단절해 백마산이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
군산에서 남동쪽으로 10km 남짓 거리에 위치한 대야에는 갈마음수, 오산명월, 오동무학, 도척온수, 광법사 효종성, 운심사 귀승문답, 우산낙조, 신창귀범 등 대야팔경(大野八景)이 있다. 그중 1920년 송암선사가 창건했다는 광법사는 상해임시정부 군산 옥구지구 총변 노춘만, 강문주, 최공훈 등이 만세운동 지도와 군자금을 모금하며 투쟁한 혈맹지로 알려진다.
대야면 죽산리 건장산 기슭에는 백제 석탑의 형태를 갖춘 ‘탑동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이 우뚝 서 있다. 화강암으로 된 탑의 높이는 5,5m. 투박하면서도 훤칠하다. ‘잘 생긴 탑’, ‘토박이 탑’, ‘여장군 탑’ 등으로 불린다. 총각 장군과 처녀 장군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전설도 내려온다. 삼층석탑은 군산 지역에서 유일하게 500여 년 전부터 불리는 ‘탑동 들노래’(농사지을 때 부르는 노동요)와 함께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날 신문이 전하는 ‘대야장’과 ‘우시장’
대야장(지경장)은 본래 옥산면 남내리에 있었다. <옥구현 지도>(1872)를 보면 당시 옥구군 박지산면 남내리 대봉산 기슭에 지경장이 기록되어 있다. 지경장 어원은 남내리에 있던 고개 지재(岐)에서 연유한다. 당시 이곳 지재가 옥구-임피 경계에 위치하여 지경(地境)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도 이곳에는 ‘장터마을’과 ‘장터고개’(서낭당고개)가 있다.
주민과 애환을 함께해온 대야장은 군산에서 유일한 전통 오일장이다. 지금도 익산, 김제, 충남 일부 지역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어 각종 해산물과 묘목, 채소, 고추 등이 큰 규모로 거래된다. 한때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우(牛)시장은 1995년 폐쇄됐다. 우시장이 활황을 누리던 70~80년대에는 장날 400여 두의 소가 거래됐다고 한다. 지금도 장터 한쪽 식당가에 한우특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야 우시장에 나온 우공(牛公)들 대부분은 농가에서 몰고 온 것이며 이들은 거의가 영리에 목적을 두지 않는 채무상환 재원조달 조라고 농협 소속 대야 우시장 관리사무소가 주석을 붙였다. 농가에서 목돈을 만들 수 있는 동산(動産)으로는 우공이 제 일호(第 一號). 이렇게 쏟아져 나온 우공들의 값은 자연히 내려가게 마련. 큰 소(2만 원 정도)를 기준해서 한 달 전보다 1500원에서 2000원씩 떨어졌고, 농번기에 들어서기 직전인 지난봄보다 무려 5~6천 원씩 폭락한 수준이라고···.”-1964년 11월 13일 치 <경향신문>
신문은 당시 대야 우시장 중개인은 26명. 그해 9월 한 달 중개 수수료는 14만 1600원이었다고 소개한다. 두당(頭當) 중개수수료가 300원인 큰 소(3세 이상)로 치면 472두 꼴이다. 따라서 5일마다 서는 그해 9월 장날 하루에 90두 이상 거래된 셈이다. 이어 신문은 “내년 농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농우(農牛)를 몰고 나온 농부들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져 있다. 11월 들어 소 값은 떨어졌는데 거래도 한산하다”며 지역 농가들의 어려운 현실을 전한다.
우시장 옆에 ‘대야극장’도 있었다. 시골의 3류 극장이었지만,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는 평일에도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시내버스가 운행되는 1963년 이후에는 시내 학생들까지 몰려왔다. 지도부 선생님 눈을 피하기 좋았고, 10원이면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애정영화와 장동휘, 문정숙 등이 등장하는 독립군영화 두 편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야장터, 고은 시인과도 인연 깊어
“옥구군 대야면 지경리. 나는 거기서 드넓은 들녘마을을 떠돌았다. 검문소에 걸려들어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거지 신세로 떠도는 것보다는 무슨 일이라도 하며 떠돌기로 작정했다. 문득 엿장수를 하고 싶었다. 나는 한 늙은 엿장수를 따라다니다가 그가 들어갈 때 그에게 통사정을 했다. 늙은 엿장수가 내뱉었다. ‘쳇, 별놈 다 보겠네. 어디 해볼 테면 해보아.’
발산리 쪽으로 넘어가는 지경리 끄트머리에 엿공장이 있었다. 엿공장은 고물상과 함께 있어서 아주 지저분했다. 그곳에서 나에게 엿불을 때며 나무주걱으로 엿물을 젓는 일이 맡겨졌다. 이렇게 해서 더운 엿을 나무기둥에 걸어 늘인다. 손바닥에 가래침까지 탁 뱉어 그것을 엿줄기에 문대어 늘여가는데 그때 엿가락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해야 한다. 쌀엿과 수수엿이었다.”-1991년 8월 1일치 <경향신문>에서
이처럼 대야장은 고은 시인과도 인연이 깊다. 1·4후퇴(1951) 이후 거리를 방황하던 고은이 대야 엿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며 장터에서 엿장수를 했던 것. 당시 나이 열아홉. 고은은 가위질을 두 손으로 하다가 아이들에게 ‘엿가새(엿가위) 하나도 못 치는 팔푼이’ 소리를 들으며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엿공장 취직 20일 남짓 되는 어느 날 지경검문소에 엿목판과 엿을 압수당하고 신체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산경찰서로 연행됐다가 곧 풀려난다.
김석근 면장과 정수영 위원장은 “대야장 역사는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은 전통 재래시장임에도 옛 모습을 추억할 수 있는 우시장과 대야극장 관련 사진은 아직 한 장도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서랍에서 잠자는 사진이 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란다”며 군산은 물론 전국 각지 출향인사들의 관심과 참여를 거듭 당부했다.
자료출처: <군산의 지명유래>(발행, 편집 이복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