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족자원의 보고 서해바다. 그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 만경강 하구에 자리한 항구도시 군산(群山)은 예로부터 수산물이 풍부했다. 구릉과 들녘을 끼고 흐르는 하천이 10개 가까이 되고, 비옥한 임피·옥구평야와 광활한 호남평야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 농산물도 풍족했다.
군산은 1995년 옥구 임피와 통합, 농어촌 복합도시가 됐다. 군산 앞바다는 고군산군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어청도, 남쪽은 위도, 북쪽은 개야도와 충남의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서해 연안은 굴곡이 심하고, 수심이 얕은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금강, 만경강 하천의 토사 유출로 썰물일 때는 강 하구에 넓은 갯벌이 형성된다.
조선 시대 군산의 주요 어류
1454년(단종 2) 펴낸 <세종실록지리지>는 옥구현 해산물(조기, 준치, 대하, 숭어 등)을 진상품으로 거론한다. 옥구·임피 주민이 칡넝쿨을 그물 형태로 엮은 기구와 대나무로 만든 발(죽방) 등으로 잡은 수산물 20여 종도 소개하고 있다.
1486년(성종 17)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염(소금), 방풍(미나릿과 식물) 등이 나온다. 이밖에 오곡(쌀·보리·콩·조·기장), 밀, 목화, 대나무, 밤, 마(麻), 뽕, 명주, 감, 배(柿), 사과, 매실, 잣, 꿀, 옻 등의 농산물과 모래무지, 굴, 정어리, 굴비(조기), 오징어, 민어, 농어, 황새기(황석어), 잉어 등의 어류를 토산품으로 명시하고 있다.
군산 연근해는 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발달해 다양한 어장이 형성됐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38)에 따르면 주요 어종은 조기, 복어, 상어, 민어, 홍어, 뱅어, 갈치, 게, 삼치, 대구, 청어, 새우, 숭어, 병치, 오징어, 가오리 등 35종에 달하였다. 그중 일본인은 값비싼 민어, 준치, 뱅어 등을 먹었고, 조선인은 흔하고 값싼 갈치, 숭어, 아귀 등을 먹었다.
진어(眞魚)로도 불리는 준치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진어는 ‘참다운 물고기’라는 뜻으로 금강에서 많이 잡혔다. 살에 가시가 많은 게 흠.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이 ‘가시만 없으면 조센징 먹기는 아까운 생선’이라며 한국인을 비하할 때 빗대어 말했다. 광복 후에는 ‘조센징’이 ‘촌놈’으로 바뀌어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1945~1961년까지 군산 수협에서 위판된 주요 어종은 조기, 갯장어, 고등어, 서대, 병치, 농어, 도미, 갈치, 대구, 민어, 상어, 복어, 대하 등 22종이었다. 1964년 기록은 뱅어, 전어, 웅어 등이 추가되어 27종으로 늘어났다. 1990년 통계는 강물 오염으로 뱅어가 사라지고, 주꾸미가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째보선창을 상징했던 황석어젓
황석어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한 바닷물고기다. 군산 지역에서는 ‘황새기’로 불리었다. 1960년대 이전 서남해안에서 많이 잡혔다. 가정에서는 찌개나 구이보다 젓갈을 담가 먹었다. 한때는 군산 째보선창을 상징하는 젓갈이기도 했다. 지금도 선창가 동네에서 황석어젓을 담그던 젓탱크(젓당꼬) 흔적을 볼 수 있다.
황석어는 잡히는 시기도 조기와 비슷한 봄철이었다. 생김새와 색깔도 비슷해 조기 새끼로 착각하기 쉬운 생선이다. 어학사전에서도 ‘참조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멸치가 크다고 꽁치가 될 수 없듯, 황석어는 아무리 커도 참조기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황석어는 맛과 어종이 조기와 다르고 씨알도 훨씬 작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들을 웅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 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이 밀렸다. 칠산 앞바다에서 잡아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반짝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
채만식 소설 <탁류>의 한 대목이다. 5월 초순 어느 날 군산 째보선창 풍경을 전하고 있다. 예전엔 매년 곡우에서 입하 사이에 조기 파시가 섰다. 어상자가 없던 시절이어서 생선을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거나 광주리에 담아 경매했다.
소설에서 말하는 ‘젓조기’ 역시 ‘황석어’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주석에서도 ‘젓을 담그는 조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젓 담그는 조기가 따로 있지 않았다. 젓갈을 즐겨 먹는 주부들이 곡우(穀雨) 파시 때 씨알이 좋은 황금빛 참조기를 골라 젓을 담그거나 해풍에 꾸둑꾸둑 말려 보관했다가 제사나 명절 때 사용하였다.
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의 총칭이다. 그중 참조기는 머리 부분에 귀돌(耳石)이 있어 석수어(石首魚)로도 불리었다. 몸 전체는 황백색을 띤다. 어기(漁期)는 4월~5월. 조기떼 이동에 따라 영광, 군산은 4월에서 5월 초순, 연평도는 5월 중순쯤 파시가 섰다. '동지나 어장' 개발(1969) 이후에는 어구 발달과 해수면 온도 변화로 4계절 내내 맛볼 수 있게 됐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몸길이 20cm 넘어가는 참조기는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60~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생선탕 전문 식당에서 조기탕을 주문하면 홍두깨 크기(25cm~30cm)의 참조기 한 마리에 햇고사리 두세 가닥이 고명으로 얹혀 나왔다. 국물 가득한 뚝배기에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면 고소한 향에 취해 침이 꼴깍 넘어갔다.
황석어는 ‘조기 사촌’으로 알려지는 부세(부서)보다 맛이 좋았다. 백조기, 수조기도 있는데, 어종 자체가 조기와 다르다. 조기를 인간에 비유한다면 부세는 흑인종, 황석어, 백조기 등은 침팬지 아니면 오랑우탄 수준이랄까. 한때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놀리는 말로 '멸치도 생선이냐', ‘황석어도 조기냐!’ 등의 우스개가 유행되기도 하였다.
무동력선이 주종을 이뤘던 1960년대 이전에는 조기 어장이 끝나면 황석어잡이가 시작됐다. 째보선창에는 황석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많은 황석어는 아낙들의 광주리와 짐꾼들의 달구지에 실려 젓당꼬(젓탱크)로 옮겨졌다. 젓당꼬에서 여름을 보낸 황석어젓은 가을이 제철이었다. 김장철이 가까워지면 밥도둑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잘 숙성된 황석어 젓국을 양동이에 남실남실 담아놓으면 누런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짠맛이 나면서도 뒷맛이 구수하고 입안에 단맛이 감돌았다. 집으로 배달된 황석어젓국은 주부들이 장작불을 피워 가마솥에 간장 달이듯 달였다가 김치를 담가 먹었다.
군산 지역 주부들이 황석어 젓국을 얼마나 선호했는지는 30개가 넘는 째보선창 부근 젓탱크와 가을이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당시 선창가 풍경이 말해준다. 김장철이 되면 젓국을 물지게로 나르는 일꾼들 고함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검정고무신에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무명옷 차림의 아낙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황금빛 젓국을 물지게로 나르며 낑낑대던 형들 모습과 구수한 젓국 냄새가 골목골목 파고들던 선창가 풍경이 아스라이 그려지는 요즘이다.
도움말: 김흥배 전 해양수산부 국립수산물 품질관리원 장항 지원장
자료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자 조종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