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종걸 스님(군산 동국사 주지) 전화를 받았다. 스님은 보여줄 사진이 있으니 언제 시내에 나오면 절에 들르라고 했다. 무슨 사진인지 궁금했다. 당장 보고 싶은 마음에 도깨비 대동강 건너듯 한달음에 달려갔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군산 신사' 관련 자료와 신사 본전으로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 흔적을 찍은 최근 사진 몇 장을 내놓았다.
신사(神社)란 일본 국조신과 왕실의 조상신, 각 지역 향토신, 국가 공로자 등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전부터 일선동조(日鮮同祖)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명분을 내세웠다.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황민화 정책의 하나로 전국 곳곳에 1천 개가 넘는 신사와 요배소를 설치하고 조선 백성에게 노골적으로 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민족 정기가 흐르는 백두대간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만들었다.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에 신사와 관청 건물을 짓고, 용천수가 솟는 우물에 쇠말뚝을 박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옛 중앙청) 건물과 서울 남산의 조선 신궁(안중근의사 기념관)이다.
일제가 서둘러 '금비라신사'를 설치한 이유
군산 역시 개항(1899)과 함께 군산진(群山鎭) 자리에 일본영사관(훗날 부청)이 들어선다. 군산진은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조선 초에 설치한 수군 기지였다. 일제는 1902년 지금의 월명공원 수시탑 부근에 일본 어업신을 모시는 금비라신사(金比羅神社)를 설치한다.
1915년에는 부청 옥상에 '천조대신'을 모신 신사를 임시로 마련했다가 1920년 대사산(현 서초등학교 뒷산) 중턱에 본전과 배전을 신축 이전한다. 초기 부청 옥상의 군산신사는 일본 혼슈 이세신궁(伊勢神宮)의 1/12로 축소한 규모였다. 그해 11월 상량식 때는 군산 부민의 영원무궁한 수호신으로 삼고자 동쪽을 향해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한다.
1926년 발행된 <군산안내>는 "군산공원(현 월명공원)은 군산부 서쪽에 있으며 경치가 웅대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창연하며 벚꽃이 필 때 조망이 가장 좋다. 금강이 눈앞에 흐르고 있으며 전북의 섬들, 충남의 산야가 일시에 펼쳐져 4계절 놀기에 적당하다. 산(대사산)허리에 '군산신사'가 있어 경내에는 장엄한 기운을 느낀다"라며 군산의 명소로 소개하고 있다.
일제가 군산에 금비라신사를 서둘러 설치한 이유는 뭘까. 조·일 통어장정(1889) 이후 일제는 조선침략의 전초전으로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군산 경포와 고군산군도 각 섬에 이주촌이 조성된다. 따라서 군산 지역에는 개항 훨씬 전부터 일본에서 이주한 어민 수백 명이 살고 있었다. 1900년에는 일본 후쿠오카(福岡縣) 어민 30호가 지금의 해망동 일대에 이주한다.
해마다 재현되는 용왕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로부터 군산지역 어민들의 풍어와 안녕을 지켜주는 신령은 군산의 진산인 월명산 산신과 서해바다 용왕님이었다. 째보선창 어부들은 북어를 선왕신(船王神)으로 모시고 고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왜놈들이 나타나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금비라신'과 '천조대신'을 받들라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가정집과 수감자들에게도 신사참배 강요
종걸 스님이 내놓은 사진은 군산신사 본전과 배전, 1930년대 신사광장 모습, 군산신사 도리이(鳥居), 군산신사에서 찍은 일본인 결혼사진과 조선인 결혼기념 가족사진, 군산중학교와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 봉안전, 심상고등소학교 교정에 세워진 내목장군(乃木將軍) 동상 앞에서 찍은 일본 학생들 기념사진, <군산개항사>(1925년 발행) 인쇄본 등이었다.
'도리이'는 신사 입구에 세워진 전통 일본식 출입문을 말한다. 일제는 조선인 학교에도 교육칙어와 소화천황 사진 등을 봉안하고 아침조회 때마다 참배를 강요하였다. 내목 장군은 러일전쟁(1904~1905) 영웅으로 두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적장을 살려준 일본 전통 사무라이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1910년에 업무를 시작한 군산형무소에도 봉안전이 설치된다. 일제는 수감자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렇듯 일제는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까지 신격화하여 자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도 이용하였다. 군산신사 밑에는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운동장)을 조성하여 각종 대회 및 집회 장소로 활용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과 함께 일장기 게양, 궁성요배 등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라는 소형 신단을 만들어 모시도록 하였다. 학생들은 1주일에 한 번씩 신사를 참배하도록 했다. 조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갈 때는 신사광장에서 장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송별하는 의미로 장행회를 거행했다.
조선인 식당 조합을 비롯해 제과점 조합, 철도 노동조합, 청년단체 발표회, 극장 공연, 환갑잔치, 결혼식장, 친목 모임 등에서도 기미가요(君が代) 열창과 궁성요배를 강요하였다. 결혼식도 일본 국조신을 모신 신사에서 올릴 것을 선전하였다. 군산신사를 배경으로 찍은 결혼기념 가족사진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이루어 많은 조선인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다수 일인과 소수 조선인으로 구성된 군산상공회의소는 해마다 군산 신사에서 상공제(商工祭)를 개최했다. 그들은 내선일체 근본을 신사에 두고 전쟁터에서 희생된 일본군 위령제와 만주, 동남아 등에서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의식을 가졌다. 이만수 경성고무 대표(상공회의소 부회두)는 1939년 8월 군산신사 개축비로 1000원을 기부, 6만 부민의 화제를 모았다.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마쓰리축제 때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을 모신 금상여를 메고 신사광장을 출발, 하오리(羽織)와 게다짝 소리 요란한 명치통(중앙로 1가), 소화통(중앙로 2가)을 지나 군산역 광장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초기엔 일본인들만 참여했으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면서 조선 청년들을 동원, 신사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군산 시내 교회 신도들 찬송가를 압수하고, 목사와 장로들은 '미국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잡아다 고문을 가하였다. 1902년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군산영명학교(군산제일고 전신)는 교내 신사 설치와 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졸업생을 끝으로 학교를 자진 폐쇄한다. 선교사들은 그해와 그 이듬해 모두 본국으로 추방당한다.
돌계단, 초석 등으로 군산신사 터 확인
일제강점기 국내에 설치된 신사는 1062개로 광복과 함께 대부분 파괴된다. 신사만큼은 남의 손에 더럽혀지는 것을 꺼렸던 일본인들이 신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승신제(昇神祭)라는 의식을 통해 신사를 불태우거나 파괴했던 것. 현재 남아 있는 신사는 천조대신을 모셨던 '구 소록도 갱생원 신사'(등록문화재 71호)가 유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신사와 금비라신사도 광복과 함께 통한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일제 수탈의 상징이자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을 군산 신사. 70년 전에 불타버린 그 건물터를 두고 누구는 지금의 서초등학교 뒤편이라 하고, 누구는 월명공원 대사산 중턱 회전그네가 있던 자리라 해서 헷갈렸는데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는 1980년대 중반, 군산 신사가 있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사는 김흥수(67)씨 설명이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지 30년쯤 됐죠. 집을 소개한 분이 일본 사람들 신당(신사)이 있던 자리라며 명당이라고 살짝 알려주더군요. 그때만 해도 저쪽 해양경찰서 자리에 군산의료원(도립병원) 건물만 있었고, 앞에 서초등학교 건물은 없었어요. 옥상에 올라가면 군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으니까요. 뒤쪽 가파른 산비탈을 넘어가면 회전그네가 있던 자리죠. 집안 이곳 저곳에 기둥을 세웠던 초석 몇 개와 난간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쪽(40평 남짓)만 구입해서 살다가 돈을 모아 밭이랑 앞집까지 사들여 넓혔죠. 모두 합해서 170평쯤 되는데, 건물 번지(9-24, 9-49, 9-10)가 각각 다릅니다. 집을 손보다가 일본어가 조각된 바위를 발견했는데, 주위에서 일본인들이 물 떠놓고 절하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집을 지으면서 덮어버렸죠. 지금 생각하니 뭐라고 써 놨는지 궁금하네요. 그렇다고 집을 헐어낼 수도 없는 일이고··. (웃음)"
군산신사 자리였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종걸 스님이 지목한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까치발을 하고 시멘트 담을 넘어다보니 일제강점기 신사광장에서 '도리이'를 지나 본전으로 올라오는 돌계단 일부가 잡초와 흙더미로 덮인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회한이 밀려왔다.
자료출처: 군산시사(2000), 동국사 침탈사료관, <군산수협 70년사>(2004), 1930년대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