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김수관 군산대 교수 사진전(주제: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던 군산수원지
1964년에 촬영한 대형 파노라마 사진(약 1/5)의 맨 오른쪽 부분이다. 주변 산들이 연꽃처럼 감싸고 있는 군산수원지와 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선 수원지고개,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초가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랑이 밭, 우마차 한 대가 겨우 오갈 수 있었던 시골길 등이 5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한다. 왼쪽 두 번째 봉우리(배꼽산)는 학창시절 소풍을 다녔던 모교 뒷산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일제가 수돗물 공급을 위해 3년 공사(1912~1915) 끝에 완공한 군산수원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도심의 산 위에 있는 호수이다. 수원지 주변 산들이 모두 발가벗은 민둥산이다. 정상에 올라도 시내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울창한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0년대는 장작이나 볏단, 산에서 긁어온 낙엽 등으로 밥을 짓고 군불을 때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도시 지역 산에 나무가 자랄 틈이 없었다.
군산수원지는 1950~1960년대 군산에서 초중고를 다닌 노년층에게 아련한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인근의 은적사와 함께 군산의 으뜸 유원지로 꼽혔기 때문. 채만식 소설 <탁류>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곳은 저수지 제방을 따라 조성된 넓은 공간에 벚나무를 심어놓아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상춘객으로 붐볐으며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광복 후에도 식수로 사용해오던 군산수원지는 수원지를 순환하는 산책로(5km)가 조성되면서 ‘월명호수’로 이름이 바뀌었고, 새벽 등산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제방과 수문(수위측정 탑)은 2005년 11월 국가 등록문화재 제207호로 지정됐다.
파노라마 군산전경 사진, 지방 문화재로 지정했으면
대형 파노라마 사진 중간 부분이다. 사진 아랫부분 건물들은 ‘빨간 벽돌집’으로 불리었던 군산형무소 전경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은 처음이라서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어른 키 두 배 높이의 벽돌담을 비롯해 벽돌공장, 푸른 죄수복 차림의 모범수들이 가꾸던 고구마밭도 그대로다. 구석구석 너무도 생생하고 현장감이 뛰어난 희귀한 사진이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군산교도소 100년사>에 따르면 군산교도소는 일제강점기 우국지사 수감과 탈옥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고, 가혹한 체벌과 고문으로 사망한 시체 암매장 등이 암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910년 11월 30일 자 <신한민보>는 “죄수 20명이 탈옥하였는데. 의병장 모 씨는 수갑을 잡은 채 도망하였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좌우 이념 대립으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시신을 집단 매장한 기록도 남아있다.
1910년 광주감옥 군산분감으로 행형 업무를 시작한 군산형무소는 전주감옥 군산분감(1920~1923), 전주형무소 군산지소(1923~1945) 등으로 변천해왔다. 광복 후(1946) 군산형무소라는 독립된 기관으로 승격된다. 1961년에는 행형법 개정으로 군산교도소로 명칭이 바뀌고, 1985년 12월 군산시 옥구읍 옥정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건물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은 군산형무소는 ‘콩밥 먹는 집’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콩을 싫어하는 재소자들은 밥을 넉넉히 받아 콩을 골라내고 먹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1986년부터 쌀(50%), 보리(50%) 혼식을 시작으로 쌀 비율이 조금씩 높아지다가 2000년대 들어 쌀 90%, 보리 10%로 바뀌었다.
천 리를 숨차게 달려온 금강이 서해로 흘러들기 전 마지막으로 굽이치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쌀을 보관하던 상옥창고와 부잔교, 반야암 등대도 보이는데 부두에 꼭 있어야 할 무역선은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3대 항구도시로 꼽혔던 그 명성이 너무도 초라하다. 1980년대까지 하수도 보급률과 도로 포장률이 전국시도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고, 땅값도 전국 시 소재지 중 가장 쌌던 것들에 비하면 그리 애석해 할 일도 아니지만.
사진 촬영에서 보정작업까지 4~5년 걸려
사진가로도 활동하는 김수관 교수. 그는 “개항 이래 최대의 전기를 맞이하여 내일을 향해 꿈틀거리는 군산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사진에 담아내고자 주제를 ‘위대한 군산’으로 정했다”며 “1964년 봄 월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폭 13m)은 과거, 2011년 겨울 은파호수공원 설경(폭 9m)은 현재, 2011년 여름 오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금강하구 풍경(폭 11m)은 미래를 상징한다”고 소개한다.
김 교수는 “도시 한복판에 산(山)이 무리지어 있고, 그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두 개씩(월명호수, 은파호수공원)이나 조성된 도시는 군산밖에 없을 것”이라며 “은파호수공원과 고군산군도, 오성산에서 바라본 금강 하구 등을 완성하는데 촬영에서 보정작업까지 4~5년 걸렸다”고 덧붙인다. 계절 사진은 1년에 한 번씩 최소한 세 번은 봐야 느낌이 전해진다는 것.
김승옥 예립미술관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회는 군산에서 처음 펼쳐지는 전국 규모의 미술인 축제 ‘2015 아트레지던시 페스티벌 in 전북’ 프로그램의 하나로 신철균 선생과 김수관 선생 사진전을 준비했다”며 “두 분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군산의 변하는 모습을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 오셨다. 금강 하구 풍경, 은파호수공원의 아름다운 설경, 보물섬으로 일컫는 고군산군도 등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신철균 작가와 김수관 교수의 인연,
“이 사진은 군산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월명산 정상에서 군산 전경을 360° 촬영한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유일한 작품이다. 이 사진 촬영자(신철균)는 당시 산자락에서 놀고 있던 동네 아이로부터 간첩신고를 당해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 간첩신고를 했던 초등학교 4학년 꼬마(김수관)는 성인이 되어 아마추어 사진가가 되었고, 40년 만에 작가와 사제지간을 넘어 망년지우가 되었으며 반세기가 넘은 지금은 결국 소장자가 되었다.”
군산의 과거를 상징하는 대형 파노라마 사진 설명문이다. 촬영일은 1964년 4월 4일(토) 오후 2시경, 장소는 군산의 진산 월명산(105m) 정상이다. 소장자인 김수관 교수에 따르면 군산의 원로 사진작가 신철균 선생 작품으로 10컷을 찍어 하나로 이었다. 보정 작업만 1년 6개월 걸렸단다. 제조 회사명과 ASA(감도) 표시가 없는 것으로 이루어 마끼가이(재생품) 필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그때만 해도 완제품 국산 필름을 구매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 유통되는 필름은 수입품(홈마끼)이거나 디피점(DP-E) 주인들이 외국 기관이나 미군 부대에서 유출된 영화용 필름(35mm)을 암실에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포장한 것으로 이를 마끼가이(국산, 재생품) 필름이라 했다. 수입품이 워낙 고가여서 당시엔 작가들도 대부분 재생품을 사용하였다.
서정적 리얼리티 사진을 추구해온 신철균. 그는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감지하고, 그 순간을 포착하기 좋아했던 군산의 원로작가이다. 촬영 대상은 주로 아이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그 시대가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 더욱 정겹다. 야외 촬영을 나갔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찰 조사를 받은 경험도 있다는 말을 듣기만 했는데, 신고한 그 초등학생이 지금의 김수관 교수라니 놀랍다. 아래는 김 교수가 전하는 사연이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월명산 아래에서 살았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산 중턱에서 전쟁놀이를 하는데 수상하게 생긴 아저씨가 카메라를 메고 정상에서 내려왔다.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답게 놀이를 중지하고 미행했다. 계속 뒤를 따르다가 명산동 파출소가 보이기에 달려가 신고했다. 장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상금을 타게 될 거라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웃음)
사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10년 전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책을 발견했다. 신철균 선생님 사진집이었다. 선생님을 만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뵐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들 사진을 찍어 익명으로 전해주는 독특한 사진작가를 소개하는 TV프로를 봤는데 주인공이 신철균 선생님이었다. 그때까지 교류가 없다가 중국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호평을 하면서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했다.
자주 만나면서도 간첩이라고 신고한 그 작가인 것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월명산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진을 찍으면서 간첩으로 오해받아 신고를 당해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 학생이 바로 접니다’라고 사실을 고백했더니 깜짝 놀라셨다. 그 후 망년지우가 됐다. 자녀가 있음에도 선생님 작품 대부분을 소장하게 됐다. 기쁘기도 하지만, 책임이 무겁다.”
김 교수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하면서도 한편 씁쓸했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앞에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보자’ 등 1960~1970년대 반공·방첩 포스터 구호가 시나브로 떠오르면서 군사독재 시절 일어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당시 정황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2014년 12월 펴낸 <스토리텔링의 보물섬 고군산군도>(김수관, 김미경 지음) 에필로그에서 “고군산군도의 변화 속도는 정말 빠르다. 지금 이 정도라도 글이나 사진으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을까 두려울 정도이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급하게 서둘러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책으로 엮는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살았던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남겨주려는 김 교수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