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월명산(月明山) 일대에 ‘시민평화공원’을 조성하자는 의견이 군산시의회에서 발의됐다. 발의 주인공은 배형원 의원(월명, 삼학, 신풍, 중앙동)이다. 그는 지난 11일(금) 열린 제189회 임시회 5분 발언에서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금광동, 신풍동, 월명산 일대에 ‘군산시민평화공원’(Gunsan Citizen Peace Park) 조성사업을 추진하자”라고 밝혔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의 입안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학문적 바탕과 역사성은 어느 분야에서나 검토되는 사항입니다. 이는 군산시가 근대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들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군산만이 가지는 역사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는 시대에 따라 평가와 해석이 다르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역사가 가지는 평가의 확장적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군산의 역사적 확장성은 동부지역인 성산과 나포지역의 패총(조개무지) 등 고대사적 시점부터 문화와 역사의 향취가 높은 임피 지역, 구암동 3.5만세 운동성지, 원도심 지역의 근대역사 지역 등과 아울러 본 의원이 제안하는 금광·신풍 지역의 시민평화공원, 그리고 서해의 국제해양관광단지 조성사업에 따르는 해양문화와 역사를 관광 벨트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배형원 의원 5분 발언에서)
배 의원은 “금광동 S아파트 단지는 애초 군산교도소가 있던 곳으로 군산교도소는 조선통감부령 24호(1910년 6월 4일)에 의해 광주감옥 군산분감으로 출발했으며, 같은 해 7월 1일 군산경찰서에서 기결수 3명, 미결수 8명을 인계받아 행형사무를 시작했고, 규정은 ‘기유각서’에 근거한다.”라고 전한다. 또한 그는 “군산교도소 자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삶과 죽음 속에 종교(religion)와 토속신앙 등의 의식이 행해졌고, 일제가 남긴 역사적 증거물을 비롯해 각종 비석과 석물 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라고 덧붙인다.
잡초가 무성한 산자락 밭에서 4·19 혁명 희생자 묘비와 애국지사 비석 등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어느 누구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배 의원은 “군산시와 학계가 사실 확인과 체계적인 고증, 그리고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정립하여 후손에게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한다. 물증을 외면하는, 역사의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군산교도소 100년사>에 따르면 군산교도소는 일제강점기 우국지사 수감과 탈옥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고, 가혹한 체벌과 고문으로 사망한 시체 암매장 등이 암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910년 11월 30일 자 <신한민보>는 “죄수 20명이 탈옥하였는데. 의병장 모 씨는 수갑을 잡은 채 도망하였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좌우 이념 대립으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시신을 집단 매장한 기록도 남아있다.
군산 월명산은 어떤 산?
월명산(105m)은 군산의 진산(鎭山)으로 장계산, 설림산, 점방산, 석치산 등과 어깨동무 하며 도심지 병풍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망망한 서해 바다는 물론 ‘군산팔경’이 한눈에 들어와 시인 묵객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특히 월명공원 산책로(대사산 전망대- 수시탑- 편백나무 군락지-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월명호수공원- 은적사- 은파호수공원)는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월명산은 조선 시대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뭄이 들면 주변 내영리(금동), 상정리(월명동), 노루목골(송풍동), 큰 절골(신흥동), 작은 절골 농민들이 나무 장작을 이고지고 정상에 올라 장작불을 태우며 비가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조선 농민의 손으로 지내던 기우제는 일제강점기 관(군산부청) 주도로 바뀌게 된다. 1926년 일제가 정상에 ‘자우혜민’(慈雨惠民)이 음각된 3m(2층 기단) 높이의 화강암 비를 세우고 군산 신사의 일본인 신관이 제례를 주관하는 일본식 기우제를 지낸 것. 비에 새겨진 ‘자우혜민’은 자애로운 비(雨)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자혜’(慈惠)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는 치욕적인 글귀로 받아들여진다. 이웃 나라 궁궐에 쳐들어가 국모를 시해하고, 황제를 협박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탄압, 학살한 일제가 그 나라 백성에게 '자혜'를 베풀다니, 모순도 그런 모순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월명산은 조선 시대부터 오성산 방향에서 떠오르는 해를 가슴으로 품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했던 해맞이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인근에 당산, 서낭당 등이 있었다. ‘형무소 고개’도 옛 지명은 ‘서낭당 고개’다. 이처럼 주민이 신성시해서 무덤도 쓰지 않았던 산이다. 그토록 신성한 장소를 일제는 개인에게 정원을 조성하고 공자묘와 보국탑(5층 석탑)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보국탑은 군산 미곡취인소(미두장) 이사장과 도의회의원, 부(府) 의회의원 등을 역임한 일본인 대농장주 모리 키쿠고로(森菊五郞)가 1935년 6월 후손이 탑 아래에 영원히 살면서 나라(일본)에 보국의 뜻을 더욱 굳건히 하길 기약하는 의미로 세웠다. 공자묘는 일제가 석가, 예수, 공자를 모시고 대동아공영권의 맹주가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모시는 제각이었다.
군산은 예로부터 물류 유통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기벌포 전투, 진포대첩 등 큰 전쟁이 일어났던 곳으로 다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월명산과 이웃한 점방산은 고대 통신망의 요지로 정상에는 조선 시대까지 사용했다는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월명공원 자락에 교도소를 비롯해 해망굴, '군산 신사'(群山 神社), '금비라 신사'(金比羅 神社) 등을 설치했다. 특히 해망굴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지휘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4·19혁명 때 시위를 앞두고 군산 시내 10여 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집결한 곳도 월명산이다. 1960년 4월 22일 월명산에 집결한 학생 200여 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산발적으로 가담한 학생들과 시민이 합세, 12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중앙로, 평화동, 대명동 거리에서 '3·15 부정선거 무효!', '이승만 정권은 각지에서 무참히 쓰러져간 학도들을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펼쳤다.
배 의원이 말하는 신풍동, 금광동, 월명산 일대에는 일제 첨병 역할을 했던 일본 사찰들과 화장터, 공동묘지, 그리고 호남에서 가장 큰 유곽 단지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북에서 내려온 난민들이 움막을 짓고 살면서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특히 국내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 경내에 일본불교 최대 종파 조동종(曹洞宗)이 세운 ‘참사문비’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군산시민평화공원’ 조성 제안이 남다르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