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양반은 누구쇼?”
영감이 대신 대답을 하고 나섰다.
“친구는 무슨 얼어 죽을.”
동행한 사람까지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만한 분위기도 아니어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주문을 했다.
“술 먼저 주시우.”
“옛수.”
팽개치듯 던져주는 술 주전자를 들어 영감에게 먼저 한잔을 딸아 주었다. 달다 쓰다 말 한마디 없이 개 눈 감추듯 마셔버렸다. 어지간히 목이 말라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도 한잔 따라 마셨다.
“커.”
정말 꿀맛이다. 막걸리가 이렇게 맛있는 술이었는지 미처 몰랐었다.
“한 사발 더 먹자.”
“안주가 나오면....”
“그게 그거지.”
자조적으로 투덜거리는 영감의 표정이 오늘따라 제법 근엄하다. 한복에 반듯한 얼굴까지 자세히 보면 천자문쯤은 달달 외울 것 같은 기품 있는 선비로 보인다.
“형제보다 더 가까운 것이 친구 일세.”
“그런가요?”
“이름이 뭔가?”
“김성호요.”
“이곳까지 무슨 일로?”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다고 내색할일도 아니어서 못들은 체 시치미를 떼고 말았다.
“이름이나 바꾸소.”
“성명철학도 하십니까?
“살아도 죽은 게야.”
“무슨 말씀이신지?”
“배를 갈라야지?”
갑자기 등이 서늘해지면서 심장이 부들거렸다. 마치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놈 생선 농어 말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일까? 관상을 보는 것일까?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주팔자쯤을 풀어보는 역술인쯤은 되는 것 같았다.
“이름을 바꾸면 될까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농어면 어떻고 광어면 어쩌겠는가?”
또 엉뚱한 소리다.
“운명이 다가온다.”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할 것 같지가 않다.
“어르신으로 모시겠습니다.”
“히히히. 술이나 사주시게.”
호탕한 것인지 아니면 좀 맹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은 편해지고 있었다. 영감과 수작을 하는 동안 주모가 매운탕을 끓여 내왔다. 성깔을 부릴 만하다싶게 맛이 깔끔했다. 하기야 지금 맛을 따질 때인가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꿀맛 같은 안주에 모처럼의 술맛이라니 주전자를 세 번이나 날랐다.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초초 했던 마음도 녹아버렸다.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마시게 되는 술일지도 모른다는 처연한 생각에 더 많이 마셨다.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밤이 늦어서야 비틀거리는 영감을 어깨동무하고 나왔다.
“어이 친구, 한잔 더하세.”
골목을 돌아 집 앞까지 왔을 때 영감이 갑자기 달려들면서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끌었다.
“주막이 또 있어요?”
“주막?”
“히히히.”
“왜 웃는 거요?”
“도처 유청산이지.”
그리고 보라는 듯이 자기 집 쪽대문을 발로 사정없이 걷어 차버리는 것이었다.
“순실아? 손님 모시고 왔다.”
허풍스럽게 소리치는 영감을 따라 어정 쩡 들어서는 문 뒤쪽에 젊은 여인 하나가 조용히 서있었다. 진작부터 나와서 영감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딸일세.”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당혹스럽다. 딸이라는 여인은 나이도 자신과 비슷하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어쩔 수 없이 더듬더듬 인사를 했다. 한데 대답이 없다. 하기야 이 밤중에 술 취한 영감을 따라 온 것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랴 싶어서 돌아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영감이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가세.”
대답도 들어 보지 않고 막무가내기로 끌어 당겼다. 순실이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여엉어”
쪽마루에 매달린 방문을 밀치자 알아들을 수 없는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전등불 밑에 보이는 방 아랫목에 누워있는 늙은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내 마누라야.”
“아, 안녕하세요.”
“어어어.”
“순실이 실랑 감이다.”
누구 보고 하는 소리 인가? 엉거주춤 서 있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방안에는 영감과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미친 영감 때문에 사람 웃기게 되고 말았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여인 앞으로 달려가 부축을 해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방문이 열렸다. 어느새 챙겼는지 들어올 때 대문 뒤에 서있던 딸 순실이가 표정 없는 얼굴로 개다리소반위에 소주 한 병을 얹어들고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