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群山)의 우리말 이름은 ‘무르뫼’다. 고려 시대에는 진포(鎭浦)라 하였다. 지금의 군산시는 예전 옥구현과 임피현을 합한 지역을 말한다. 단종 2년(1454)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는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島)이 둘 있는데 군산도(선유도)와 망입도라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을 진포로 옮기고 ‘군산’이라 칭하자 ‘고군산’(古群山)으로 부르게 됐다 한다.
일제는 갯벌과 갈대밭을 매립하고 일본식 마치(町) 체계로 도시를 조성하였다. 본정통(해망로) 전주통(영화동) 명치정(중앙로1가) 소화통(중앙로 2가), 천대전정(월명동), 횡전정(신창동), 서빈정(해망동), 동빈정(째보선창), 강호정(죽성로) 등이 이때 등장한다. 간선도로도 9개(1조통~9조통) 만들어진다. 그중 6조통이 오늘의 ‘대학로’이다. 군산의 도로와 동명에서 정(町·마찌)은 일본식, 동(洞)은 우리의 전통 지명인 리(里)와 같은 뜻을 지닌다.
일제가 도로를 만들 때마다 고유 지명 사라져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는 군산 진영(鎭營)을 중심으로 월명공원 아래(현 신흥동 일대로 추정) 부근으로 내영리(內營里) 월명동, 금광동 일대로 추정되는 당정리(唐井里) 영화동 일대의 강변리(江邊里) 구영리(舊營里), 개복동 중앙로 일대로 보이는 거석리(擧石里), 그리고 죽성리(竹城里), 경포리(京浦里), 경장리(京場里), 해망정(海望亭)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다.” -이복웅의 <군산의 지명유래>(군산문화원) 24쪽-
군산은 일제가 인구 5만을 목표로 개발한 항구도시다.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질 때마다 정감어린 전래 지명이 기억에서 하나씩 잊혀갔다. 소화통 개통과 함께 사라진 '큰샘거리'와 '구복동' 그리고 명산동 일대 중정리, 월명산 아래 상정리(윗시암), 영화동 부근 구영리, 월명공원 아래 내영리, 중앙로 1가 강변리, 개복동 신창동 부근 거석리,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등이다.
군산은 일제 식민지 역사와 우리의 전통문화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따라서 식민지 잔재가 원도심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유일한 대한제국 시절 건물인 구 세관을 비롯해 나가사키18은행, 조선은행, 히로쓰가옥, 동국사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잔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광복 70년이 지난 오늘, 시내버스 기사와 고객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섞여 오간다. 일제가 제멋대로 붙인 지명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6~9일 일본 아사히카와시(旭川市) 문학자료관에서 ‘제15차 동북아 기독교 작가회의’가 열렸다. 이날 ‘박두진의 기독교사상과 자연 그리고 생명의 발견 - <해>, <청산도>, <갈보리 2>를 중심으로 -’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고 귀국한 이복웅(71) 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을 24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군산의 지명유래> 저자인 그에게 조상들의 삶과 풍류가 느껴지는 군산의 지명(구시장, 설애시장, 콩나물고개, 해망령 등)에 관해 얘기를 들어보았다. 아래는 이 원장과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시장’은 일제가 만든 용어, 1918년 이전엔 ‘장터’로 불려
-신교육, 기독교, 서양의료 등이 호남 최초로 시작된 곳이 군산시 구암동의 ‘구암동산’(구암산)으로 알려진다. 3·5만세운동 기념탑도 세우고, 관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구암동’이 먼저인지, ‘궁멀’(궁말)이 먼저인지 지명을 놓고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웃음) 당연히 ‘궁멀’(弓乙里))이 오래됐다. 구암산을 끼고 흐르는 두 지류(구암천, 둔덕천)가 활 모양으로 휘어지면서 흐른다고 해서 ‘활 궁’(弓)을 붙었고, ‘멀’은 리(里)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고종 12년(1875)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임피현 궁을리’였는데, 일제가 식민통치를 시작 하면서 ‘옥구군 구암리’로 바꿨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제멋대로 덧씌웠다. 그것도 일제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이름으로.”
-신영동 마트형 공설시장의 다른 이름은 ‘구시장’이다. 100년 가까이 된 전통시장을 구시장이라 부르는지 그 연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군산의 시장을 얘기하면서 400년 역사를 지닌 경장시장(설애장터)를 빼면 안 된다. 예부터 설애(경장, 경암동 지역)에 장이 섰고, 서울, 강경, 전주, 태인 등 전국 각지로 물자가 오갈 정도로 규모도 대단했다. 옥구(군산) 지방 3대 시장(장재, 경장, 지경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경포천, 경장동, 경암동 등이 경장시장 첫머리를 딴 지명이다. 이를 풀이하면 ‘설애장터’다. ‘서래장터’로도 불리었는데 소설 <탁류>는 ‘스래’라 적었더라. 기미년 3·5만세운동이 ‘설애장터 만세운동’으로 불리는 것도 주모자들이 장날, 장터에서 궐기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군산에 ‘시장’(市場)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해가 1918년이다. 그 이전에는 ‘장터’로 불리었다. 그해 일제가 지금의 감독(감도가) 부근에 장재시장을 개설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31년 지금의 자리로 시장을 옮기고, 상시가 되어 계속 번창하자 1935년 구 미원파출소-구 신호약국 거리에 새 시장을 조성한다. 그 때 사람들이 ‘신시장’이라 부르니까 자연스럽게 구시장이 된 거다. 군산도가 고군산도가 되는 것처럼. 신시장은 한국전쟁 후 책방골목이 된다.”
조상의 풍류가 느껴지는 콩나물고개
-마을 형태가 술독(항아리)을 닮아 붙여진 지명도 있다고 하는데?
“회현면 학당리(學堂里)에 가면 지형이 ‘술항아리’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술앙마을’(술항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에서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그곳을 ‘풍촌’이라 하고,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은 ‘술앙마을’이라고 한다. 지금도 노인들에게 술앙마을 가는 길을 물으면 그 마을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며 고향 친구처럼 반가워한다, 한문 서당이 있어서 붙여진 학당리는 김관영 의원이 태어나 자란 쌈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이 지금의 개복, 창성, 둔율동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하니까 콩나물고개도 가난한 사람들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본래 의미는 ‘가난’과 먼 것 같은데?
“콩나물고개는 가난보다 조상들의 풍류가 느껴지는 지명이다. 조선 시대 임피, 회현, 지경(대야) 사람들이 군산 진영에 오려면 논길, 들길 그리고, 송경교(아흔아홉다리)를 지나 팔마재(경장동 부근)부터 산길을 이용했다. 그러면 어디에서 쉬느냐. 군산진 둔소(屯所)가 있는 둔율동 고개였다. ‘둔뱀이’(둔배미)로도 불리었다. 그 고개에 기막히게 시원한 콩나물국을 내놓는 주막이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콩나물고개’라는 지명이 태어났다. 광복 후 책방거리가 됐고, 고갯마루에 있던 서점 간판을 따서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됐다.
주막에서 막걸리와 콩나물국으로 허기를 달랜 사람들은 능선을 따라 솔꼬지(솔곶이·소룡동)로 넘어갔다. ‘솔꼬지’는 마을 뒷산에 솔꽃(松花)이 만발하면 꽃물결이 향기와 함께 장관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하나 설은 마을 지형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 곶(串)을 이루었다는 거다. 옛날에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본 사람들이 둑을 쌓아 수원지를 만들어 식수로 이용했다. 시민들에게 산책코스로 사랑받는 월명호수공원이 그 수원지다.
군산 지역에서 가장 높았던 고개는 ‘해망령’
-군산은 지명에 나타나듯 나지막한 산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도시이다. 금강으로 유입되는 지류를 끼고 들녘도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쌀 미(米)와 고개, 재, 령이 들어가는 지명도 많은데?
“원도심권에만 팔마재, 콩나물고개, 군청고개, 형무소고개, 동령고개, 해망령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고개가 구 무선국 자리에 있던 ‘해망령’(海望嶺)이다. 지금의 수시탑 자리에 ‘해망정’(海望亭)이란 정자도 있었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군산진 지도에도 해망령과 해망정이 표기되어 있다. 망망한 서해를 바라보는 산이라 하여 ‘해망’을 사용했을 것이다. 해망정에 오르면 ‘군산팔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풍류객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군산에는 령(嶺)으로 불리는 고개가 두 개 있다. 해망령과 동령고개이다. 같은 고개라도 치(峙)는 자그만 언덕을 뜻하고, 현(峴)은 일반 고개(재)를 말하는 접미사이고. 령(嶺)은 대관령, 추풍령, 노령 등에서 알 수 있듯 높은 산, 높은 산맥 등에 주로 많이 쓰인다.
그밖에 서울(개경)로 보낼 쌀(나락)을 말리는 건조장으로 활용했던 미장동(米場洞). 일을 돕고 조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 ‘덤 벌’, ‘도움 멀’로 불리다가 한자 ‘조촌’(助村)을 붙인 조촌동, 공납미와 물화를 건조하고 포장하는 장소였던 경장동(京場洞), 쌀창고가 많았던 동네 장미동(藏米洞), 3천 마리 학이 춤추는 지형이라 해서 붙여진 삼학동(三鶴洞), 비만 조금 내려도 진흙탕이 되는 동네라서 불린 ‘흙 구더기’, 달구지가 쌀을 싣고 가면 덜커덕 소리가 요란하다고 해서 붙여진 ‘덜컥다리’ 등 조상들의 삶이 느껴지는 지명도 많다.”
이 원장은 군대가 주둔했던 군사기지, 역사적인 전쟁과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 역마를 갈아타는 곳으로 사람과 말이 자고 먹을 수 있는 역(驛)과 원(院) 관련 마을. 서원과 관련된 마을. 송아지, 강아지, 쥐, 말 등 동물에서 유래한 마을, 전설, 용(龍), 전답, 나무, 다리(橋), 조류, 풍수지리설 등과 관련된 마을 이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원장은 “팥죽과 시루떡을 파는 떡 전, 모시전, 싸전(쌀집 골목), 장작거리 등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져 안타깝다”며 “도시나 시골의 농촌이나 그 지방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있다. 그중 지명은 우리 삶의 원천이고 오랜 역사이며 문화이다. 이는 역사의 맥이고 흐름이다. 거듭 말하지만, 지명은 사람 이름만큼이나 소중하며 이러한 인식과 의식이 곧 애향심”이라고 덧붙였다.
덧붙임: 이복웅 원장은 군산문화원장(2002~2013), 전북문화원 연합회장(2004~2012), 한국문화원 연합회 이사(2004~2012)를 지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 국무총리 표창, 제2회 군산문학상, 군산시민의 장 문화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군산의 지명 유래> <군산 풍물지> <우리 고장 역사인물을 찾아서> 등 7권이 있다. 채만식 문학과 인생, 채만식과 군산의 행적, 군산 근대건축물 조사 연구, 고군산도의 스토리텔링 자료 조사연구, 군산 지역 향교·서원 조사 연구 등 20여 편의 조사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