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가게도 조그맣고 내세울 것도 없는디, 인터뷰를 하자고 하네.”
21년째 같은 자리에서 통닭집을 하는 손균홍(66)씨가 말했다. 그 전에 그는 서울에서 27년간 생닭을 납품하면서 닭을 튀겨 팔았다. 통닭 인생 48년, 10대 후반에 닭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국민학교’ 졸업하고는 건어물 가게와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했다. 열여덟 살에 서울로 갔다.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통닭집, 충무로에 있는 ‘영양센터’ 종업원이 되었다.
균홍씨는 진득하게 일을 배웠다. 군대 갔다 와서도 똑같은 일을 했다. 새로 여는 통닭집이 있으면 가서 일손을 보탰다. 주방장으로 불리지 않았지만 주방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됐다. 균홍씨 나이 스물아홉, 명절 때 군산에 와서 미면 사는 아가씨와 선을 보게 됐다. 그날 하필이면 균홍씨가 탄 버스 바퀴는 ‘빵꾸’가 났다. 약속 시간은 1시간이나 지나버렸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딸 부잣집의 ‘미모 담당’ 셋째 딸 양근옥씨는 다방에서 균홍씨를 기다렸다. 새마을지도자(그 시절에는 알아줬다고 함)나 부농의 아들이 좋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던 근옥씨였다. 열아홉 살부터 들일을 하며 동생 다섯 명을 건사해온 근옥씨의 맹세는 “시골로는 절대 시집 안 가!”였다. 서울에 산다는 균홍씨를 마냥 기다린 까닭이다.
“사람이 착하더라고요. 근데 너무 가난한 거야. 우리 친정은 잘 살았거든요. 내가 돈보고 결혼할 것 같았으면, 진작 했지. ‘사람만 보자’는 생각으로 약혼하고 스물다섯 살에 서울 갔어요. 날짜도 기억해. 10월 17일. 그 밤에 이 사람이 자기 지나온 세월을 조곤조곤 얘기를 하는데 너무 안타까운 거야. 그래서 우리 친정 헛간보다 못한 데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요.”
부부는 상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연년생으로 딸 둘을 낳았다. 자고 일어나면 아기들 손이 꽁꽁 어는 집에서 ‘바게쓰’로 물을 길러와 살림을 했다. 균홍씨는 닭 도매업을 하고, 근옥씨는 시장 한 귀퉁이에 앉아서 파리 끈끈이부터 온갖 것을 팔았다. 88 서울올림픽 때, 사람들이 우르르 개막식과 폐막식 볼 때에도 일본으로 수출하는 옷에 단추를 달았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사글세로 살다가 전세 70만 원짜리 집, 나중에는 2700만 원짜리 집을 대출 끼고서 샀다. 손균홍씨 부부와 딸 둘은 방하나 부엌 하나만 썼다. 나머지 방들은 모두 월세를 주었다. 그렇게 살면서 시골에 있는 시동생들을 건사했다. 일찍 일이 끝나는 균홍씨가 밤에 방범 봉사를 하고, 근옥씨는 독거노인들 반찬 해다 주는 활동을 했다.
“서울에서 살만해지니까 계속 목이 아프고, 머리가 아펐어요. 진통제를 안 먹으면 못 견뎌. 마음의 병이었지요. 홀어머니가 시골에 혼자 계시니까. 밑에 동생들도 어리고요. 1994년 11월 30일에 짐 싸서 군산으로 내려왔어요. 거짓말처럼 안 아퍼요. 그때 내가 마흔 넷, 군산에서도 서울서 하던 식으로 닭을 도소매로 팔고, 튀겨서 팔려고 했어요. 맛은 자신했어요. 근데 저 사람(아내)이 ‘고생하는 김에 더 합시다’고 하면서 술까지 팔자고 하대요.”
균홍씨는 3개월간 가게를 알아보러 군산 곳곳을 다녔다. 논과 밭 사이에 들어선 나운2동 롯데 아파트 단지, 그 앞에 휑하게 있는 상가. 양주 파는 자리가 좋아 보였다. 20평짜리 가게, 권리금 2500만 원을 냈다. 전기구이 통닭집 ‘신토불이’를 차렸다. 보증금 3500만 원에 월세 38만 원을 내는데 장사가 안 됐다. 하루 매상이 보통 5만원, 많아 봐야 10만 원이었다.
상가 사람들과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들 중 몇이 “속았어요, 속았어”라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 앞 상가 권리금은 보통 500만 원. 균홍씨네는 다른 데보다 다섯 배는 더 주고 온 셈. 24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을 권리금으로 준 거였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내 맘 같지가 않아서’ 좌절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금 겪은 일도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서로를 감쌌다.
하루하루 버티면서 균홍씨와 근옥씨는 메뉴를 개발했다. 서울에서 생닭 납품하던 시절에 맛있는 닭은 다 먹어봤다. 그 비결도 알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서 부부는 갖가지 양념을 써서 닭을 요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토불이 닭똥집’.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먹었다. 손이 큰 근옥씨는 “그냥은 못 주니까 푸짐하게 드릴게요”하며 음식을 내놓았다.
“개업하고 3년 지나서부터 잘 됐어요. 지금은 배달 주문을 안 받지만, 처음 10년간은 배달도 했어요. 내가 배달 나가면, 이 사람(아내) 혼자서 고생 많이 했어요. 주방에서 음식 조리하고, 손님들 시중들고, 생맥주 따르고, 계산하고. 배달은 나한테는 쉬는 시간이에요. 그찮아요? 밖으로 나가면 바람 쐬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한테 최대한 자유를 줘 가면서 내가 장사를 이끌었어요. 장사하는 집은 주로 남자들이 밖으로 도는데 우리 집은 거꾸로 됐어요.”
‘신토불이’를 시작한 지 4년차. 근옥씨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동네 부녀회에 가입했다. 서울에서도 하던 일이었다. 김장도 담그고, 바자회도 가고, 무료급식소 봉사도 다녔다. 군산시 부녀회 총무까지 맡으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자고 일어나면 봉사 하러 가고, 오후에는 가게에 나와서 장사하는 생활. 타고난 활력이 있어서 지치지도 않았다.
균홍씨는 ‘보살님’이 아닌 사람, 가끔은 아내한테 화가 났다. 바깥에 일 보러 나간 아내는 가게 문을 여는 시간에도 오지 않았다. 균홍씨는 손님들에게 “죄송해요. 홀에서 잠깐 앉아계세요” 하고는 배달 다녀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균홍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절대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을 많이 했어요. 쪼금 짜증내다가 쪼금 불어(삐쳐) 있다가. 이 사람이 가게에 있다가 없다가 하니까 나도 거기에 또 다시 맞춰 나갔지요. 계속 불어 있으면 나만 건강 뺏기잖아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 쓰면, 손발이 안 맞아요. 이 사람 만치로 일을 못하잖아요. 우리는 같이 오래 해서 손발이 척척 맞아요. 노하우가 있으니까.”
19년간 ‘신토불이’의 유일한 휴일은 추석과 설. 따로 쉬는 날이 없었다. 손님들도 “신토불이는 안 쉬어”라면서 일요일 저녁에도 찾아주었다. 균홍씨는 자고 일어나면 몸이 자동충전 되는 스타일, 건강은 그의 자랑거리. “항시 내 몸한테 고맙다고 해요. 아파서 누워 있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균홍씨는 2년 전부터 한 달에 두 번씩 가게 문을 닫고 쉰다.
균홍씨는 오전 9시에 나와서 장사 준비를 한다. 전기구이 통닭은 미리 익혀놓아야 한다. 가게 청소도 하고, 장도 본다. 낮밥 먹고 나서는 집으로 간다. 간단한 운동을 하고 짧은 낮잠을 잔다. 다시 오후 3시에 출근해서 음식 재료를 손질해 놓는다. 장사 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는다. 아내를 최대한 늦게, 한창 바쁜 오후 8시쯤에 나오게 하려는 균홍씨의 배려다.
“내가 이 사람을 고생 많이 시켜서 다리가 아퍼요. 너무 오래 서서 일하니까 무릎과 무릎 사이 연골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다 달라붙었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인공 연골을 집어넣는 수술. 내가 그래서 이 사람한테 ‘사람 써서 할 테니까 몸 관리만 해라’고 하죠. 말을 안 들어요. 날마다 나와요. 봉사도 계속 다니고. 항상 미안한 감이 있어요.”
‘신토불이’의 공식 영업시간은 오후 6시부터 오후 12시. 그러나 공단에서 교대근무를 마친 손님들은 오후 4시면 찾아온다. “준비 다 끝났는데 맥칼 없이(그냥) 앉아있을 필요가 없지요. 손님 모셔야지”라고 하는 균홍씨. ‘신토불이’의 주 고객은 회사 다니는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 한 번 먹어본 맛을 못 잊어서 일부러 서울에서 닭똥집 먹으러 오는 손님도 있다.
20평짜리 가게에 테이블은 11개. “하룻밤에 보통 두세 바퀴 돌아요. 경기를 안 타요”라는 전기통닭 구이 집. 몇 년째 값도 그대로인 실비 집. 어떤 날은 자리가 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손님들은 “은행 마냥 번호표를 줘요”라고 한다. 전주에서 지인들 여덟 명과 봉고차를 타고 온 손님들이 기다리니까 다른 손님들이 자리를 양보해 준 적도 있다.
그러나 술장사는 거칠다. 기분 좋게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일행들끼리 싸우거나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시비가 붙기도 한다. 그때 테이블에 위에 있는 병이나 컵, 접시나 젓가락은 바로 흉기로 돌변한다. 균홍씨 부부는 그래서 딸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가게에 못 오게 했다. 딸들만은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제빵 같은 기술을 배웠으면 했다.
“큰딸(손경화, 36)이 3년 전부터 주방 일을 배우면서 같이 해요. 이놈의 다리가 안 아프면 널러 다니면서 내가 일하겄는디... 우리 딸이 어려보이니까 ‘야! 야!’ 하는 손님도 있어요. 중학교 1학년짜리 애가 있는 엄마인데. 장사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는다고 말해주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요. 이마만큼 다져진 가게라도 나중 일을 생각하면 그래요.”
근사하고 점잖은 사람도, 거친 태도로 주변을 냉랭하게 만드는 사람도, 가게에 들어오면, 대접받아야 하는 손님이다. 그래서 손균홍씨 부부는 ‘장사하는 사람은 자기 속을 빼놓고 해야 한다’는 말을 새기고 살아왔다. 손님이 가게 안에서 무슨 일을 내도, 수습할 때는 무조건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그게 가게 주인의 도리라고 여겨 왔다.
균홍씨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고 했다. ‘신토불이’의 닭똥집을 앞세워 몇 곳에서만 체인점을 내도 대박이 날 거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균홍씨는 “이만큼으로만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한자리에서 21년째 가게를 하고 있다. 38만원 내던 월세는 150만원으로 올랐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을 세월. 균홍씨의 마음도 조금은 바뀌고 말았다.
“원래는 쉰다섯 살까지만 할라고 했어요. (웃음)근데 환갑도 벌써 넘어서 예순여섯 됐어요. 아무래도 칠순까지는 할 것 같어요. 그러면 안심이 되지. 그때 우리 딸이 마흔 살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