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니의 발길 닿는 대로>
일제강점기 유곽 밀집지역, 명산동 거리를 거닐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군산 백정상점(白井商店)에서 발행한 우편엽서다. 위치는 군산부(群山府) 산수정(山手町)이다. 지금의 명산동 거리가 되겠다.(공영주차장~명산동 사거리) 비포장이지만 도로가 잘 정비되고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것으로 미루어 1930년대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치하 명산동은 유곽 밀집 지역으로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창이었다.
도로 왼편 첫 번째 건물은 유곽 상반루, 두 번째 건물도 유곽(玉の家), 세 번째 건물도 유곽(松の家)이다. 가장 높은 네 번째 기와 건물은 일제강점기 호남에서 가장 큰 유곽으로 전해지는 칠복루(七福樓)이다. 놀라운 것은 건물 세 채가 유곽 단지 한 불럭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와를 얹은 상반루 담은 화려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
명산동은 본래 옥구군에 속한 산 아랫마을이었다. 군산 개항(1899) 이전에는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라 해서 ‘신흥리’라 하였고, 거룻배도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1910년 일부가 군산부에 편입되고, 지명변경에 따라 '6조통', '신흥동', 전정(田町), 경정(京町) 등으로 불리었다. 해방 후 왜식 동명 변경으로 명산동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명산시장 일대, 개항 초기부터 노른자위 땅으로 부각
우리나라 최초 유곽은 1902년 부산에 만들어졌으며 대규모 유곽인 공창은 1904년에 조성된 서울의 ‘신정유곽’이 시초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1904년 <관보>는 1901년 당시 군산의 일본인 직업 가운데 기생(게이샤) 14명, 1903년 21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군산에 유곽이 서울, 부산 등과 비슷한 시기, 아니면 그보다 일찍 들어왔음을 시사한다.
조선 침탈의 야욕에 차있던 일제는 을사늑약(1905) 이전부터 전국의 주요 도시마다 유곽을 조성한다. 그 과정에서 군산은 유곽 후보지 선정을 위해 일본 민단에 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리고 신흥동 산수정(지금의 명산시장 일대), 경장리(팔마산 동쪽 평지), 경포리(고속버스터미널 부근) 등이 후보지로 떠오른다. 세 곳 모두 일본인 지주들 이권과 관련되어 경쟁이 심했다.
군산의 유곽은 지주들의 치열한 경합 끝에 신흥동 산수정으로 결정된다. 그곳은 군산의 금융왕 사토(左藤)의 소유지였다. 사토는 전답과 자그만 저수지가 있던 신흥동 지역을 싼값에 사뒀다가 유곽이 들어설 5천 평을 일본 민회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조건으로 다른 후보들을 물리치고 유치했다 한다. 따라서 사토는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동경 의학 전문학과를 졸업한 '도쓰가요 시이지'란 일본 의사는 1904년 7월 당시 촌구석이었던 신흥동에 ‘붕운당(鵬雲堂) 병원'을 개업한다. 사토란 자가 5천 명을 기증할 정도로 많은 토지를 사들이고, 의대 출신 의사가 병원을 개업한 것 등으로 미루어 지금의 명산시장 일대는 개항(1899) 초기부터 일인들이 탐내는 노른자위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신흥동 지역에는 칠복루, 명월루, 방본루, 태평각 산월루, 평남루, 대월루, 송월루, 대화루, 상반루, 군산루, 송학루 등 20여개의 유곽이 있었다. 일본 헌병 분소와 크고 작은 카페(미유끼카페, 아리랑카페, 히노마루 카페), 살롱, 호텔, 여관, 음식점도 있어 이 일대가 대규모 집창촌 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유교적 윤리 체계에서 은근한 멋으로 술과 기예를 즐겼다. 그처럼 기생문화에 익숙해 있던 조선 사람들은 유곽을 거부하거나 터부시했다. 고 하반영 화백은 유곽에 출입하는 사람을 '쫄짜'에 비유해서 '조로야'(卒伍屋)라고 놀렸다고 전한다. 미두장(米豆場)을 배경으로 1930년대 사회상을 풍자한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도 '신흥동 갈보'로 등장한다.
신흥동 유곽은 해방(1945) 후 미 군정청의 공창제도 폐지 방침에 따라 1948년 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명산시장(유과꼬시장)이 형성되면서 유곽 건물들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학교, 공장, 상점,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1950~1953)으로 피난민 임시수용소가 됐을 때는 한 건물에 30~40가구가 입주, 생활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명산동 유곽 거리, 해방 후 어떻게 달라졌나
위는 1번 사진과 같은 위치에서 찍은 오늘의 명산동 거리 모습이다. 옛 유곽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도로도 비포장에서 포장으로 바뀌고, 4차선으로 확장됐다. 그럼에도 거리 분위기는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유곽 ‘상반루’ 자리에 지금은 빵집, 자전거포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45년째 살고 있다는 자전거포 주인 채수출(59) 씨를 만났다.
“우리 자전거포가 ‘상반루’ 자리라니, 유곽 건물로 알고는 있었지만, 듣고 보니 기분이 묘하네요. (웃음) 제가 열네 살 때 이곳(명산동)에 왔으니까 딱 45년이 됩니다. 처음에는 형님이 운영하는 자전거포 일을 도우면서 기술을 배웠죠. 그때만 해도 이 길은 자동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2차선 도로였습니다. 1989년인가 4차선으로 확장됐죠.”
해방과 함께 유곽은 사라진다. 일본 기생(게이샤)들도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조선 여성들은 길 건너 산동네(개복동, 창성동 일대)로 옮겨 성매매를 계속한다. ‘오백고지’로 불리는 집창촌을 이룬 것. 이에 대해 채씨는 이 자그만 동네에 병원과 약국이 세 개씩이나 있었던 것도 그에 연유한다고 지적한다. 모 산부인과는 ‘오백고지 아가씨들 상대로 돈을 가마니로 벌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는 것. 채씨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곳 토박이 노인에게 들은 얘기인데, 유곽 초기에는 기모노 차림의 일인들이 내항 부근에서 자그만 배를 타고 이곳까지 올라와 아가씨들과 술도 마시고 유희를 즐겼다고 합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곽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죠. 지금도 안으로 들어가면 유곽에서 사용하던 우물과 정원수가 있는 집이 있어요. 제 자전거포도 20여 년 전 옆집에서 건물을 짓다가 무너져 새로 지었죠.
시장 입구의 화교소학교가 옛날 유곽(칠복루)이었죠. 2002년 봄인가, 그 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제가 처음 발견하고 신고했어요. 친구와 얘기하고 있는데 검은 연기가 조금씩 올라오더라고요. 곧바로 신고하고 집에서 호루라기를 가지고 나와 교통 통제를 했죠. 신고가 조금만 늦었어도 옆 건물까지 불타버렸을 겁니다. 화재 원인은 급사가 쓰레기를 소각하다가 바람을 타고 번져 대형 화재가 발생했던 거죠.”
칠복루는 1925년경 향나무 등 고급 목재를 일본에서 가져다 지은 목조건물(대지 576평, 건물 1, 2층 각 90평)이었다. 해방 후 적산가옥이 됐다가 화교협회가 인수, 1949년 11월부터 화교소학교로 사용해왔다. 정원에 있던 일본식 석탑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광장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명산동 거리는 해방 후 군산국악원을 비롯해 금주당(아이스케키집), 구암병원, 백제병원, 백약국, 명산옥, 대지약국, 서해원, 대북루(중국음식점), 백운목욕탕, 화교소학교, 왕자표 고무신 대리점 등 많은 상가가 들어섰다. 명산동 사거리에는 파출소, 덕수병원, 홍약국, 건재상, 서점 등이 있었고, 명산시장에는 피난민이 운영하는 국수 공장도 있었다.
그중 여약사(백효기)가 운영하는 백약국은 많은 얘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언변이 좋았던 백 약사는 1950년대 전북에서 유일한 여성 야당정치인으로 도의원을 지냈다. 동국사 승려 고은이 혜초 스님과 결별하고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던 곳도 백약국이다.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어느 날 오후 고은이 아무도 없는 사이에 극약 다섯 알을 먹고 저승 문턱에 다다르는 찰라, 백 약사가 발견하고 길 건너에 있던 구암병원 응급실로 옮겨 살려낸 것.
채수출 씨는 아이스케키와 금주당 이야기도 꺼냈다.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기 전 금주당 자리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