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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죽이지 않고서 내 것을 늘리는 일, 낙농의 전망은 무한대!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02.01 15:08:2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시골에 와서 젊음을 투자한다면, 저는 적극 추천해요. 자기 의지가 뚜렷하면, 스무 살에 사장이 되는 곳도 시골이에요. 한 달에 백만 원 벌려고 들어왔는데 50만 원도 못 버는 곳이 시골이고, 천만 원 벌 수 있는 곳도 시골이에요. 최하 5년은 보고 일해야 해요. 시골에서 한 번 해보겠다고 찾아오면, 저는 같이 갈 용의가 있어요.”

 

장선수씨가 말했다. 그는 군산시 임피면에서 스물두 살 때부터 낙농업을 하고 있다. 그는 중고등학생 때는 앞만 보고 달렸다. 마라톤 선수였다. 전북체고를 다닐 때는 전북도에서 3위 안에 드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1등 메달을 따야지만 진학할 수 있는 한국체대, 그는 입시에 실패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운동을 그만두라고 했다.

 

스무 살 선수씨, 아버지 말을 따랐다. 군장대학 체육과로 진학했다가 품질안전관리과로 전과해서 다녔다. 임피에서 농사짓는 그의 아버지는 군산 삼학동에 3층짜리 건물 한 채를 갖고 있었다.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요리학원, 3층에는 몇 개의 시민단체가 세 들어 있었다. 선수씨의 아버지는 그에게 “군산 시민연대 가서 자원봉사 해라”고 말했다.

 

“저한테는 시민연대가 직장이었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똑같이 출퇴근 했어요. 6개월 동안 보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시민단체가 왜 필요한지를 알았어요. 시민운동이 성장하던 때라서 직접 찾아오는 시민들도 많았어요. 월급은 아버지가 직접 줬어요. 월세 들어오는 돈에서 50만원을요. 밥은 시민연대서 주고요.”

 

대학을 졸업한 선수씨에게 다가온 군 입대. 그도, 그의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생산인력을 활용하도록 지원하는 병역대체 복무제도는 게임 S/W, 생활용품, 시멘트 요업, 수산물가공, 식음료, 신발, 애니메이션, 의료의약, 외항화물, 전기, 정보처리, 화학 등의 분야에 걸쳐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먼저 물꼬를 트며 말했다.

 

“군대 갈래? 농사 지을래?”

“저는 소 킬(키울) 건데요.”

 

생뚱맞은 선택은 아니었다. 선수씨가 고2 때까지, 아버지는 농사와 젖소 키우는 일을 겸했다. 그는 절차를 밟아서 병역특례 후계농업경영인이 됐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아서 나포에 있는 한 농장을 임대했다. 젖소 150두를 키웠다. 스물두 살 청년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하루에 두 번, 새벽 6시와 저녁 6시에 젖 짜는 것부터 배웠다. 2001년 6월이었다.

 

“괜히 했다고 후회한 적 있죠. 아플 때요. 그 때는 화풀이 해야죠. 그래서 담배 피고, 술 먹잖아요. 솔직히 일은 안 힘들어요. 사이클만 알면, 농장 일은 돌아가요. 근데 제가 기계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마인드를 바꾸는 거죠. 저는 사람을 써서 같이 일해요. 낙농은 80%가 혼자 하거나 식구들끼리만 하거든요. 그래도 농사철에는 잠 못 자고 일했어요.”

 

 


 

그는 낙농과 함께 논농사도 했다. 임대와 자경 합해서 60필지(1필지에 1200평)를 짓고 있다. 남의 논 기계 작업하는 것까지 합치면 12만 평이다. 추수가 끝나도 일은 안 끝난다. 소 먹이로 쓸 볏짚을 거대한 마시멜로처럼 마는 일을 한다. 그 볏짚들은 나라 곳곳의 소 키우는 집으로 보내진다. 그는 낙농 30%, 논농사 30%, 볏짚작업 40%로 나누어 일한단다.

 

3D 업종에 속하는 시골 일, 2년 3개월의 병역특례가 끝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고생 그만 해라”고 했다. 어머니는 “넥타이 차고 출근하는 일 하면 어찌겄냐”고 물었다. 선수씨는 부모님이 시킨다고 따르지 않았다. 낙농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게 인생, 가치관이 분명해졌다.

 

 


 

낙농 13년차, 선수씨에게 ‘재해’는 없었다. 사는 것은 원래 힘든 일들의 연속,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재해라는 말을 안 쓴다. 어려움이 있긴 있었다. 젖소는 새끼를 낳아야지만 젖을 짤 수 있다. 젖소의 한 달은 사람의 1년과 맞먹는다. 보통 생후 14-15개월부터 수정을 시킨다. 285일 만에 새끼를 낳는다. 그 뒤 305일 동안 젖이 잘 나온다.

 

“젖소는 번식이 가장 중요해요. 근데 농장의 모든 소가 전혀 수정이 안 됐어요. 6개월 만에 먹이가 잘못 됐다는 걸 알았어요.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그 뒤로 젖소하고 한우로 자연종부(교미)를 시켰어요. 그래서 ‘먹치’(교잡종)를 나오게 했거든요. 당시에는 먹치 시세가 무지 좋았어요. 젖소 키우는 데서 고기를 팔아먹으려고 하니까 안 된 거죠. 망했어요.”

 

젖소를 키우면, 젖을 더 많이 짜려고 고민을 해야 한다. 젖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더 좋은 새끼를 낳게 하는데 몇 년이 걸린다. 선수씨는 젖소 대신 먹치를 낳게 해서 기르고 파느라 2년을 허비했다. 젖소끼리 교미를 시켰으면, 소도 늘어나고, 젖도 더 많이 짰을 거다.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선수씨의 농장을 5년쯤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시골 일은 하느님과도 동업해야 한다. 변수가 많다. 선수씨는 “걱정을 한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안 해요. 닥쳐서 생각해요”라고 했다. 눈이 엄청 많이 와서 축사 천장이 무너지고 젖소들이 얼어 죽은 적 있다. 선수씨는 다시 소를 사들였다. 1만 원짜리 어린 송아지도 있었지만 새끼 밴 어미 젖소는 450만원까지 했다.

 

“축사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는 게 낙농이에요. 한우는 소가 늘어나면 빨리 소를 팔아야 해요. 낙농은 우유를 짜면 짤수록 돈이 되잖아요. 새끼를 계속 낳고 젖을 짜야 해요. 그 돈을 가지고, 다시 축사를 짓게 돼요. ‘내가 소 200두인데 1천 두를 키워야겠다’고 하면, 돈을 저축해놔야죠. 그 돈으로 건물 짓고, 소를 사야죠. 천재지변을 당하면, 다시 지어야죠.”

 

낙농을 해서 번 돈을 다시 낙농에 투자하면 망할 일이 없다고 한다. 젖소 키워서 번 돈으로 건물 보러 다니거나 외제차 타고 밖으로 돌면 실패하는 낙농. 놀아도 농장에서 놀면 전망은 무한대!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서 내 것을 늘리는 게 가능하단다. 서로 공존해야만 살아남는 일. 원료도 혼자 사면 1천원이지만 함께 사면 90원,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차이가 난다고.

 

그렇다고 시골 생활이 유토피아는 아니다. 기반 없이 시작하면 어렵다. 선수씨도 아버지의 땅을 임대해서 ‘다람원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농기계 한 대 사는데 드는 돈이 억, 기본적으로 빚들이 어마어마하다. 선수씨도 4억 원의 빚이 있다. 한 달 수입은 4천만 원,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4백만 원 정도 남는다. 그 돈으로 애들 키우면서 먹고 산다.

 

“시골은 원래 결혼 적령기를 놓치면 힘들어요. 저는 선 봐서 스물여덟 살에 했어요. 우리 각시(이서희, 회사원)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다섯 살, 세 살 먹은 딸이 둘 있고, 올 2월에 셋째 딸이 태어나요. 각시가 낳는다면, 또 낳아야죠. (웃음)쌀 있겠다! 우유 있겠다! 저한테 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도 결혼부터 하라고 권해요.”

 

그는 낙농을 배우겠다는 청년을 환영한다. “한 달에 백만 원 주고 가르쳐주세요. 근데 꿈은 월 3백만 원입니다" 하는 의지가 좋다. 목부 한 사람을 가르치는데 7개월쯤 걸린다. 힘들다고 떠나버리기도 한다. 이제는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면접을 통해 그 사람을 파악한다. 낙농에 10년을 투자할 마음으로 온다면, 농장을 운영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단다.

 

선수씨는 “낙농에서 CEO를 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소를 혼자 보면, 사람 사는 것처럼 살기 어렵다. 집안에 상이 나거나 친구가 결혼해도, 때 맞춰 돌아와 젖을 짜야 한다.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 둘이 일하면, 또 소를 늘리고, 사람을 구한다. 그는 소 1천두, 목부 열 명이 일하는 농장으로 키우고 싶다. 지금은 목부 두 명과 함께 소 200두를 키우고 있다.

 

어떤 일이든 10년 동안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선수씨는 부정했다. 낙농과 같이 시작한 논농사도 13년차. 농사철에는 잠을 못 자서 눈에 핏발이 선다. 그렇게 일해도 모른다고 했다. 선수씨의 일이 아닌 아버지의 일이라서 주도적으로 한 게 아니니까. 그는 “자기가 틀어잡지 않고 하는 일은, 백년을 하든, 천년을 하든, 머슴이에요”라고 했다.

 

 


 

지난 해 연말, 낙농인 장선수씨는 병원에서 열흘을 보냈다. 사다리 타고 축사 지붕으로 올라가다가 떨어졌다. 어깨를 좀 다쳤다. 얼굴에도 티가 나게 찰과상을 입었다. 그는 완쾌가 덜 된 모습으로 인터뷰 하러 나왔다. 이야기 한 지 1시간이 넘어가니까 “쉬었다가 합시다!”라고 했다. 솔직한 자세가 어여뻤다.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그는 말했다.

 

“(웃으면서) 원래 이렇게 못 생기지 않았어요.”

 

선수씨는 나가서 담배 피우고 왔다. 나는 그에게 우리 집에서 키운 소 이야기를 했다. 아홉 살 때, 날마다 소 풀 뜯기러 다녔다. 해질 녘에 소가 날뛰면서 집으로 가면, 나는 울면서 뒤따라갔다. 어느 날, 소는 논둑에 친 농약을 먹었다. 우리 집 헛간까지 달려와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입김이 많이 나던 겨울밤에 뿌사리(수송아지)를 낳은 장한 소, 우리 식구였는데.

 

그도 자신의 농장에서 기르는 젖소들을 식구라고 불렀다. 어려운 사정이 닥쳐도 소를 굶기지 않는다고 했다. “새끼 낳을 때도 제가 직접 받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의 손을 봤다. 젖 짜고, 사료와 풀을 섞어 먹이를 주고, 축사를 청소하고 건사하는 낙농인의 손. 스스로 선택한 일을 책임지는 손은 그의 얼굴과도 닮았다. 나는 그의 미모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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