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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기업 CEO’가 되는 비결은 정직과 투명한 경영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1.01 13:23:3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저는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면서 익혔습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경영철학에서

 

 


일본 기업인 ‘마쓰시타 경영철학’을 삶의 지표로 삼아

자수성가로 대창그룹 창업주가 된 조시영(趙時永: 69세) 회장을 군산시 장미동 미즈커피에서 만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인(CEO)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 경영철학’을 삶의 지표로 삼는다.  기업 경영도 정직과 도전, 창의와 상생 등을 핵심 가치로 정한다.  마쓰시타는 스물세 살에 전기제작소(파나소닉 전신)를 설립, 훗날 일본 최고 갑부가 되는 입지적인 인물. 항상 미래에 대비하는 자세, 자신의 단점을 소중한 경험으로 체화하는 자세, 젊은이처럼 공부하고 생각하는 자세 등이 그의 성공비결로 알려진다.

 

“가난, 허약체질, 초등학교 4학년 중퇴 등 자신의 약점들을 성공의 바탕으로 삼았던 마쓰시타의 성공스토리는 농사로는 꿈을 이루지 못하겠기에,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 사업을 시작한 나의 경우와 흡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니까 일을 열심히 해야 했고,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건강을 관리해야 했고, 대학교육을 못 받았으니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던 점 등……, 소는 비빌 곳이 언덕이라지만 나에게 언덕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뛰었죠.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랬다.  1944년 12월 25일 전북 군산시 성산면에서 빈농의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조 회장은 어려서부터 무척 쇠약했다.  네 살 무렵엔 괴질에 걸려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천우신조로 살아나기도.  아버지는 무능했고, 어머니가 10명이 넘는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호미를 무기 삼아 가난과 전쟁을 치렀다.  달걀, 잡곡, 푸성귀 등을 이고지고 다니면서 보따리장사도 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배부르게 먹기에는 늘 부족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아버지 형제분들, 우리 8남매 해서 가족이 열여섯이나 됐는데요, 어머니는 발가락이 삐져나온 고무신을 신고 20리(8km)가 넘는 군산까지 하루에 두 차례씩 오가며 생계를 꾸려 나갔어요.  짐이 많을 때는 제가 짐꾼 역할을 했고, 뒷산(마초산)에 올라 어머니를 기다리곤 하였죠.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를 도와드리면서 성공에 대한 욕망과 도전 정신을 자연스럽게 익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마쓰시타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그의 경영철학이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조 회장은 “성공한 경영인이 되려면 직원, 거래처, 고객 모두와 즐겁게 상생(相生)하는 기업문화 정착에 앞장서겠다는 각오로 기본과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목표를 정해서 반드시 실행해야 하며, 미래를 개척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상대에게 신뢰를 쌓는 것도 상생이고,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심도 상생이고, 정성이 담긴 성금이나 봉사정신도 ‘상생의 길’일 것”이라고 덧붙인다.

  

외롭게 떠다니는 돛단배 바라보며 이웃의 소중함 깨달아

조 회장의 고향 도암리 마동마을은 마초산(麻草山)을 중심으로 올망졸망한 구릉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고즈넉했다.  특히 숲이 무성한 오성산(227m) 계곡 주변의 암자와 고사지(古寺址)는 봄가을 소풍은 물론 아이들이 가장 즐겨 찾았던 놀이터.  소년 조시영은 아랫마을 윗마을 아이들과 공치기(야구)도 하고,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도 하고, 논바닥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썰매도 타고, 토끼몰이도 하는 등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백제인의 우국충절 정신이 깃들어 있어 예로부터 군산의 영산(靈山)으로 전해지는 오성산(五聖山).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로 채만식의 대표작 <탁류>를 연상시키는 금강의 우람한 물줄기가 태연히 흐르고, 군산 시가지는 물론, 충남 서천과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어린 조시영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소년 조시영은 외롭게 나뭇잎처럼 떠다니는 돛단배를 바라보며 이웃의 소중함과 나눔의 행복을 깨닫는다.

 

인터뷰 이틀 전에 만난 조 회장의 성산초등학교 급우 오희택(시택)씨는 “학교댕길 때 조시영이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무척 순하고 착했으며, 말은 없어도 마음은 신중하고 깊은 학생이었다”며 “성공한 사업가가 된 지금은 고향 농민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작물과 특산품(장아찌)을 회사 식당에서 사용할 정도로 애향심이 남다른 친구”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말은 제주도,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어른신들 말씀 듣고 서울행 결심

조 회장의 유년기는 해방(1945) 후 남북한 단독정부수립(1948), 민족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1950~1953) 등이 보여주듯 현대사의 격변기였다.  가난과 불신으로 사회는 극히 혼란스러웠고, 학교는 휴교가 잦아 부잣집 자녀들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조시영 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금새)의 특별한 관심으로 군산남중에 진학한다.  조숙했던 그는 자신의 진로를 중학생 때 스스로 결정한다.

 

“집이 워낙 가난해서 상급학교 진학은 생각도 못 했죠.  그런데 이금새 선생님이 찾아와 ‘조시영은 꼭 중학교 시험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권하셨고, 어머니가 기꺼이 받아들여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의 진로에 가장 영향을 끼친 곳은 학교가 아닌 마을 정자나무 아래였어요.  ‘말(馬)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서 시작하는 것이 성공하기가 좋다.’는 마을 어른들 얘기가 가슴에 와 닿아 상경을 결심하게 됐죠.  농사로는 도저히 꿈을 펼칠 수 없겠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중학교를 졸업한 조시영은 ‘성공한 기업인이 되기 전에는 고향 땅을 밟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섰다.  장항선 기차를 타려고 해망동 도선장(나루터)에 도착해서 배를 기다리는데 오성산 줄기가 아슴하게 보였다.  그 순간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친구들 모습이 푸른 하늘에 그려지면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는 “배 기관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육중한 엔진 소리가 울음소리처럼 슬프게 들리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라며 당시 추억을 회상했다.

 

‘맨발의 청춘’으로 시작, 글로벌 기업 CEO가 되기까지

원효로에 있는 소규모 비철금속 공장에 취직한 조시영은 매일 새벽 4시에 기상, 청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월급도 없는 직장인. 배가 고프면 참았고, 옷이 떨어지면 벗고 다녔다.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새벽마다 부근 재래시장을 돌며 고물(원자재)을 수집, 자전거에 싣고 오전에는 왕십리, 오후엔 영등포 공장으로 날랐다.  그때 얻은 별명이 ‘영등포 맨발의 청춘’. 그럼에도 밑바닥 생활이 창피하지 않았고, 훌륭한 CEO가 되겠다는 꿈을 하루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눈물겨운 ‘맨발의 청춘’ 생활 5년이 지난 1968년 목돈을 손에 쥔다.  인심이 후한 공장 주인이 고생했다며 퇴직금 조로 50만 원을 준 것.  처음 만져보는 거액이었다.  어디에 쓸까 고민 고민 하다가 적지만 고향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군산으로 내려와 전답 200평을 사들인다.  손바닥 넓이의 땅이지만 처음으로 등기를 내고 땅 주인이 되니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그 전답은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소유하고 있다 한다.

 

청년 조시영은 1968년 소규모 가내 수공업으로 경영인의 첫발을 내디딘다.  그는 원자재 구매, 생산, 영업, 관리 등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거래처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그동안 벌어놓은 재산 1200만 원을 모두 떼인다.  망연자실.  그럼에도 맨발의 청춘 시절에 쌓은 신뢰와 신용 덕에 거래처들을 찾아다니며 외상으로 원자재를 구매할 수 있었고, 피해도 생각보다 빠르게 복구했다.

 

“1973년 유류파동에 불경기까지 겹쳐 위기를 맞았지만, 많은 분의 도움으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위기를 넘기면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듯 1974년에는 반도체·전기·전자부품, 자동차, 선박, 산업용, 기계류 등 첨단 기초소재로 활용되는 황동봉 전문 제조업체 ‘대창공업사’를 창립했습니다.  그 후 연 30% 이상 흑자를 기록하면서 1977년에는 ‘대창공업주식회사’로 법인전환을 했어요, 그때부터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일본을 방문했는데요.  선진기업들의 경영방침을 배우기 위해서였죠.  한두 번 다니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더군요.  2~3년 후에는 유럽, 동독까지 다녔는데 진취적인 모습에서 제 사고도 바뀌더군요.  어떤 품목을 생산하든 세계 1등 기업을 만들면 그 어떤 불황도, 불경기도 견뎌낼 수 있으니 업종에 얽매이지 말자는 거였죠.  결국, 비철금속 부분에 집중 투자해서 1985년 반월공장, 1995년에 오늘의 시화공장(1만 5000평)을 완공했습니다.”

 

(주)대창은 외환위기(IMF) 시절인 1998년 국제금융공사(IFC)로부터 3650만 달러 규모 투자유치에 성공한다.  외자유치 후 경영정보시스템(MIS)을 도입, 날로 발전하여 2001년 동탑 산업훈장, 2002년 우수 자본재 개발 대통령상을 받는다.  2004년 1억 불, 2006년 2억 불, 2008년 3억 불 수출탑을 수상하면서 황동봉 분야 국내 1위, 아시아 1위, 세계 3위를 마크하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다.  2011년에는 대창그룹 2020 비전 선포식을 개최하기도.

 

 


“조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업인”

대창그룹은 2013년 12월 현재 계열사 6개와 미국·중국에 3개의 해외 지사를 두고 있다.  계열사는 1974년 설립한 (주)대창을 모체로, 1988년 설립한 (주)서원, 그룹 성장의 동력으로 2002년에 인수한 (주)태우, 국내 최고 황동봉 밸브회사 (주)에쎈테크, 국내 압연업체 (주)아이엔 스틸, 2005년 중국에 설립한 (주)개평대창 등. 그중 (주)서원은 그룹의 지주회사이며, (주)대창은 환경친화적 기업으로 세계 최고 품질의 동합금 제조업체로 인정받고 있다.

 

재벌 및 CEO(최고경영자) 경영성적 평가분석 사이트 ‘CEO 스코어’(대표 박주근)가 2013년 7월 국내 500대 기업의 현직 CEO 668명의 학사 학위를 조사한 결과, 고등학교 졸업자는 조 회장을 비롯해 4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500대 기업 전체 CEO 가운데 0.6%에 불과한 비율이다.  고졸 출신이 국내에서 최고경영자 직함을 갖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이기도 하다.

 

항도 군산은 예로부터 공업도시로, 고려제지, 한국합판, 경성고무, 백화양조, 청구목재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향토기업이 많았다.  전국 각지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였고, 1970년대 방위성금 1억 원을 기탁한 기업이 전국에서 처음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향토기업 리더(CEO)들은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채 모두 고인이 됐으며, 기업들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조 회장의 경영철학과 애향심이 더욱 돋보이는지 모른다.

 

김항석 성산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은 “조시영 회장은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기업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실현한 군산의 자랑스러운 기업인이다”고 평가한다.  군산대 경영학부 교수와 대학원장을 역임한 그는 “특히 위기 때마다 도전의 기회로 삼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조 회장의 기업 성공담은 전문경영인이 되려고 공부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별도 박스 구성: 조시영 회장은 지난 2003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황동 제조업체로 성장시킨 노력과 경영전문가로서 실무, 이론 등을 바탕으로 주위 상공인과 대학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한국 산업기술대학교로부터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외에 경기도 시흥시 교육발전진흥재단 이사장(2004~2006), 한국경영연구원 기업가회 회장(1999~2004), 시흥시 상공회의소 회장(1997~2009) 등을 역임했다.

 

주식회사 대창(大昌)/주식회사 서원(瑞元)

429-794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1292-4(시화산단 4나 506)

Tel: 031-496-3200/ Fax: 031-499-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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