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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 수필집_마지막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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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1 17:22:1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마을 앞 산자락이 노오랗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코스모스가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향으로 가는 차창에 앉아 들녘을 본다. 내 고향은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금만평야의 한 켠에 있다.  내 어릴 적 이맘때면 황금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그 물결 위를 그림처럼 비행하는 참새 떼들이 하늘을 가릴 듯 떼 지어 날 곤 했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북쪽에서 피난 내려온 허기진 사람들이 이삭을 주워 한 해 겨울을 보낼 만큼 풍요롭고 인심이 좋기도 했던 그 들녘에 지금은 휑뎅그렁하게 허수아비만 서있다.

벌써 추수가 끝난 것일까?  풍요로움은 간 곳 없고 이삭을 줍던 정식이 어머니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메뚜기 잡던 정식이, 순녀는 지금은 무엇을 할까?

 

무심한 세월이 너무나 아쉽다.  아무도 없는 들녘에 눈치 없이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내 인생의 황혼을 본다.  내게도 육십 번째의 가을이 아닌가?  누가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했다지만 그딴 소리야 나이 먹는 게 서러워서 위로를 한답시고 만들어 낸 소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애써 태연한 척 해보지만 언제부터인가 몸놀림도 둔해졌고 별일도 아년 작은 일에도 선경이 쓰이고 조바심부터 일어난다.

 

어디 그뿐인가?  고소하고 달콤하던 소주의 첫 잔조차 씁씁한 맛이 나는 것이 50년의 벗인 술조차 내 나이를 알아보는 듯싶다.  분수를 지키기로 말한다면 나도 당연히 이제 술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은 버려야 할 때지만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술에 대해서만은 애착이 더 보태어지고 있다.  의사는 내게 여러 번 술을 끊으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금주를 결심하면서도 작심삼일일 뿐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했다.  내가 여러 번 결심을 하면서도 번번이 금주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주변에서 말하는 것처럼 알코올 중독성 때문이고 또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 불안하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라고 하겠지만 더 자세히 말하라고 한다면 미련한 정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금주를 결심하고 맨숭거리는 기분으로 이르게 귀가를 서둘다가 정말 우연히 길가에서 반가운 친구나 이웃을 만나게 되면 핑계가 아니라 그냥 악수만 하고 헤어져 지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없다.  방금 감기약을 먹은 처지라 한들 상대가 거절하기 전에는 대폿집을 곁에 두고 그냥 지나치자고 할 수가 없다.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 주는 각 지방의 토속주를 구경만하고 팽개칠 만큼 매정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비우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술과 친구를 하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어젯밤 일만 해도 그렇다.  모처럼 술을 피해 도망질을 쳤다.  하지만 대문을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술을 마시지 않은 머릿속이 가볍고 맑아야 할 텐데 마치 지갑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할 뿐만 아니라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오면서 무겁기 까지 했다.  괜히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코뚜레 낀 망아지처럼 저녁 밥상 앞에 앉아 보지만 텁텁한 입맛에 식욕까지 별로였기에 애꿎은 반찬 투정만 하다가 아내에게 욕만 얻어먹고 말았다.  괜한 조바심이 생겨 서성거림으로 허둥대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 보지만 잠은 천리나 달아나 버리고 창 밖에 낙엽 구르는 작은 소리에까지 신경이 곤두서더니 알 수 없는 불안이 겹쳐오면서 찌증이 나고 급기야는 지나가 버린 하잘것없는 사건들까지 떠올려 머릿속을 온통 뒤집고 만다.  이럴 때는 어김없이 좋았던 일들보다는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일들만이 떠오른다.

 

평생을 술과 함께 살아온 내 처지이고 보면 술 때문에 당한 망신이 한두 번이었던가?  급한 김에 남의 집 창문 밑에서 참지 못하고 냅다 내갈기다가 미처 바지 지퍼를 올리지 못하고 젊은 여자에게 멱살을 잡힌 건 애교로 봐 준다고 하더라도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 부부싸움에 끼여 들어 무슨 의협심이라고 사나이답게 남편에게 발길질을 했다가 오히려 놈팽이 마누라에게 머리칼을 쥐어뜯긴 것도 순전히 술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얼굴을 붉히던 나는 더는 참지를 못하고 벌떡 일어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거려 숨겨 둔 술병을 찾아들 수밖에 없다.  “당신 큰 병이오.”  잠든 줄 알았던 아내가 실눈을 뜨고 비웃었지만 대꾸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서툴러 병마개를 따고 한잔 술을 목으로 넘겼다.  씁쓰레한 첫맛과는 달리 목을 타고 내려가는 짜릿하고 상큼한 맛이 가슴부터 후련하게 해 준다.  크아-.  역시 술병을 찾아들기를 잘했다 싶다.  달빛이 출렁이는 창가에 앉아 분위기를 잡아 본다.  역시 술은 분위기다.  이런 밤, 보글거리는 김치찌개나 끓여 놓고 옛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와 함께 밤새워 사랑하던 이야기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를 흔들어 깨워 술벗을 하고 싶지만 잠이 모자란 그녀에게 차마 다가가 흔들 수가 없다.

 

“한잔 또 한잔.”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이 혼자 마신다.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을 하면서 달빛 속에 울어대는 귀뚜라미 노래가 황홀하게 들릴 때쯤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이 환한 장미꽃처럼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사람아 죽고 사는 것이 팔자인데 무엇이 두려워 그처럼 사랑하는 옛 친구를 버리려고 하는가?”  내 오래된 친구 안 도사가 어느 날 술잔 앞에서 금주하겠다고 떠벌리는 내게 한 충고다.  안 도사는 동양철학의 대가다.  나와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 만나서 지금껏 함께 살아온 친구다.  그러고 보면 내가 술을 만날 때 그를 만났으니 그 또한 50년 벗인 셈이다.  술과 안 도사 그리고 나.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니 술은 나보다 안 도사가 더 사랑했던 듯싶다.

 

그가 동양철학에 빠져 든 것부터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풀리지 않는 운명을 해결해 보고 싶어서였으니 그의 삶은 자신의 말대로 그의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친구들과 가까워지려고 억지로 술을 쫓아갔다면 안 도사야말로 진정 술을 사랑한 애주가로 술의 멋을 좋아 마셨는지도 모른다.  열 번을 생각해 봐도 그의 말이 옳은 듯싶다.  벌써 한 갑자의 세월을 살아 버린 내가 무엇이 두려워 지금처럼 외로운 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주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옛 친구를 금주라는 명목으로 헌신짝 버리듯 하려 하는 것일까?

 

아쉬워서 또 한 잔­.  “그래 좋다마시자.”  

나는 또 한 잔을 따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가슴속에 담는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귀뚤귀뚤-.  창 밖에 울음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 귀뚜리 한 놈이 깡충거리며 문턱을 넘어온다.  다가오는 추위가 무서워 도망치듯 뛰어들고 있는가?  감싸 주고 싶다.  이제 또 며칠 후면 내 작은 뜰에 흰 눈이 쌓일 것이다.  내 마지막 소망은 다가오는 겨울 함박눈이 쌓이는 뜰을 바라볼 때도 지금처럼 내 50년 벗인 술을 가슴에 담고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늘은 분명히 내 작은 소망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라대곤 선생님의 [취해서 50년 4부작] 연재를 이번호로 끝이 났습니다.  

다음호부터는 라대곤 선생님의 새로운 작품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변함없이 매거진군산에 좋은 글과 큰 힘을 보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라대곤 선생님과 그의 가족 분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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