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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 수필집_십구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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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1 14:25:0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내 생활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은 팔팔 년도쯤이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느라 온 나라가 술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붕 떠서 우줄거려졌다.  새삼 주변을 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힘깨나 쓰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방죽 고기가 되어 개헤엄을 치듯 어색한 유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크게 보였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도 염원하던 소위 말하는 ‘상류사회’ 의 사람이 된 것이다.  돌이켜 보니 그 지겹던 은행 빚도 모두 갚아져 있었다.  항상 허기져 쫓아다니던 내 주머니에는 아무 곳에서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술값이 넉넉히 들어 있었고, 언제나 썰렁했던 내 옆에는 모여든 사람들로 열기가 올라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떠오르는 햇살이 눈부신 것도 느낄 수가 있었고, 길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의 색깔이 화사하다는 것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든 때엔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이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사정 모른다고 연예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어도 어색하기는커녕 어깨춤이 절로 나왔고 입맛까지 변해서 순대국 집 막소주 따위는 언제 먹어 본 적 있던가 싶게 아예 기억조차나지 않았다.

 

그뿐인가? 대리석으로 층계를 만든 화려한 룸살롱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골이 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오르내리면서 한 병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양주를 물마시듯 마시고는 시도 때도 없이 게트림을 하다 보니 뱃속이 놀라서 위장병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문득문득 정신이 돌아오면서 혼자 있을 때면 아련하게 춘천집이며 풍월이나 청춘 같은 죽마고우가 그립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고기 맛을 본 스님이 빈대까지 삼킨다는 이야기처럼 나라는 인간도 어쩔 수 없이 옛날 따위는 잊어먹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난같이 시작해서 구멍가게 같던 내 회사가 어느새 큰 기업으로 발전해서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큰 물결로 나를 거칠게 밀치고 있었기 때문에 파도에 휩싸인 나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골프가 대중화되기 전인 그 무렵 골프는 상류사회의 전유불로 알려져 있어 돈 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운동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골프가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타의에 의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시작했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장삿속을 위해서였다.  지금이야 나이 먹고 하는 일 없이, 남의 눈치 볼 처지도 아니고 해서 가끔씩 친구들과 함께 필드에 나가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내 골프의 처음 시작은 완전히 희극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서울에 있는 아주 높은 관직에 있는 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사실 그분은 내가 만나기 위해 수개월 전부터 여러 곳에 청탁을 넣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뛸 듯이 기뻤지만 곧 실망했던 것은 골프의 골 자도 모르는 나보고 자신을 만나려면 주말에 서울 근교의 골프장으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변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참으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까짓것 누구는 처음부터 했냐?’  골프채 한 벌 사 메고 만나자는 골프장으로 바쁘게 찾아 나섰다.  그날 내가 더 큰 실수를 한 것은 그때까지 골프를 치지 못하는 것은 상류사회원이 늦게 되었다는 증표 같아서 창피한 마음에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조언을 듣지 않고 서둘렀다는 점이다.  그냥 객기로 골프화를 신고 골프장에 나타난 어색한 내 꼴을 본 일행들은 기가 막혀 낯빛이 변했지만 나는 낯 두껍게 그 수모를 무릅쓰고 공을 손에 든 채 십팔 홀이 끝날 때까지 죽자 살자 따라다녔다.  골프의 재미는커녕 그날 현지에서 사 신은 새 골프화의 끈은 왜 그리 자주 풀어지는지 잔디밭이 마치 지옥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으로는 파아란 하늘 위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하얀 골프공을 보면서 나도 이제 골퍼가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날 망신이야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만회할 수 있었던 건 십구 홀에서였다.  십팔 홀이 끝인 골프 정규 코스에서 십구 홀은 당연히 술자리였다.  운동이 끝나고 샤워 후에 앉은 술자리는 내게는 당연히 지옥을 벗어난 천국이었다.  정릉 어느 골짜기에 있던 비밀 요정이었다.  간판도 없는 가정집이었는데 내 생전에 처음 보는 화려한 가구들로 눈이 부셨다.  또 다소 마음이 떨려 왔지만 술이야 남에게 져 본 적이 없는 내가 잠시 눈알을 다룩거렸을 뿐 금세 간이 부어오르는 병이 또 도져 오고 있었다.  “라 사장, 술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어?"  그분이 비웃듯 말했다.  “골프 핸디로 치변 싱글이지요.” 나는 낮에 들은풍월로 넉살좋게 응수를 했다.  “그럼 마음 놓고 한잔해도 되겠군.”  “감사합니다.”

 

마음이 놓여 새삼스럽게 둘러보니 가구 못지않게 화려하고 예쁜 기생들이 네 명이나 앉아 있었다.  “기생이 아니고 탤런트야.”  아-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이었다.  “한잔 올리겠습니다.” 섬섬옥수로 술병을 받쳐 들었다.  양주병이 소주병 비워지듯 비워져 가고 있었다.  온 방안에 여자들의 교성이 가득했다.  넥타이를 풀고 팔도 걷어 올리고 낮에 골프장의 망신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내게 흐느적이는 술판은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 만난 격이었다.  한창 술판이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그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옷걸이에 결려 있는 상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옜다, 하나씩 받아라.” 흥겨워진 기분으로 팁을 던져 주고 있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둥둥 뛰기 시작했다.  지갑에서 무 뽑듯 하는 수표는 백만 원짜리가 아닌가?  아무리 술에 간이 붓는 병이 있는 나라고 한들 백만 원짜리를 만 원짜리 뽑듯이 하는 것은 현기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걸.......’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그 지갑은 분명히 내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옷걸이에 걸려 있는 감색 양복 상의가 비슷하기는 했지만 지갑을 꺼낸 그 상의는 분명 내 것이었다.  ‘그거 내 지갑입니다.’  금세 목까지 넘어오는 소리를 꿀쩍 삼켰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높은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오늘 내가 골프장에서 당한 망신이며 고생이 허사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어차피 뇌물로 가져온 돈이 아니냐?’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술이라도 한잔을 더 먹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게 아닌가?  “자 마십시다.”  나는 술잔이 넘어오는 대로 넙죽넙죽 받으면서 정신없이 술잔을 넘겼다.  ‘이제 지갑에 몇 장이나 남았을까?’

 

아무리 털어버리려고 해도 술에 취해 열 받은 머릿속엔 자꾸 백만 원짜리 수표가 아른거려 술을 마실수록 정선이 더 또렷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항의하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마시고 보자.’  나는 기분도 바꿀 겸 옆에 앉은 탤런트라는 여인의 예쁜 손을 끌어당겼다.  계곡 주며 배꼽 술이며, 꼭지 술 따위 등 내가 처음 보는 상류사회의 질펀한 술자리에 나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이튿날 빈털터리가 된 나는 예금도 없는 당좌수표까지 끊고 요정을 나오면서 쓰린 속을 감추느라 몹시 허둥댔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때 그 높은 분이 옷 색깔 때문에 정말 지갑을 잘못 꺼낸 것인지 아니면 상류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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