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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40년을 넘어 인생 2막을 간다 - 종교인의 삶, 봉사의 삶을 향하여 - 군산성광교회 고재찬 장로(전 전북개발공사 사장)
글 : 채명룡 /
2019.04.01 14:22:0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공직 40년을 넘어 인생 2막을 간다

- 종교인의 삶, 봉사의 삶을 향하여 

- 군산성광교회 고재찬 장로(전 전북개발공사 사장)

 

 

 

 

 

자그만치 43년 9개월이라고 한다. 

 

까치머리 총각으로 시작한 공직자의 길. 그 길에는 고재찬이라는 이름을 걸고 헤쳐왔던 외롭고 험한 봉사의 세월이 녹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한 평생이 될 기간이지만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청년 가장에겐 한 길을 가야만 하는 숙명의 시간이었다. 

 


 

 

 3년 전인 2015년 말, 그는 기술직 공무원으로써 가장 큰 영예인 전북도 건설교통국장을 마치고 전북개발공사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 이전에 군산시 공무원으로 27년 임실군 공무원으로 4년을 봉직하였다. 국가와 지역을 위한 그의 공직자의 길이 이렇게 묵고 묵어 찬란히 빛나는 고목으로 남았다. 오늘, 그는 어려움에 쌓였던 전북개발공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퇴임했다. 군산과 전북도의 살아 있는 자산이다.

 

 

 

12살 초등 6학년, 5남매의 가장이 되다  

 

 초등 6학년 때인 12살 때, 그의 막내 동생 후남이가 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토목건설업을 했던 아버지였으나 군대에서 입은 화상으로 인한 병마를 이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서른셋에 홀로되셨고, 그 때부터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장사는 다하시면서 오직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는데 온 힘을 쏟으셨던 그리운 어머니시다. 

 


 

 

 어려서 가장이 된 소년 고재찬, 5남매의 외아들로써 감당해야 했던 그 동안의 책임과 의무의 크기는 얼마였을까.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나가 돈을 벌어야만 했던 그는 대학은 꿈도 꿔보지 못했고, 전주공고에 들어갔다. 운명처럼 토목과에 배정되었다. 살던 임실에서 통학과 자취를 번갈아 했다.

 

 “고 3때 실습으로 내장산 국립공원 경계측량도 하였고, 지금의 도로관리사업소와 농어촌공사 등에서 측량과 설계 일을 도우면서 세상 물정을 익혔지요. 만 18세가 넘어선 1975년 3월 16일 시험에 합격해서 그 해 5월 1일자로 임실군 청웅면으로 발령받아 공직을 시작했지요.”

 


 

 

 공직자의 길로 뛰어 들었을 때 그는 약관이었다. 기술직 공무원으로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엄격했고 타인에겐 관대했다. 그런 리더십이 임실에서 군산으로 전출 와서 군산사람으로 자리 잡았고, 군산에서 손가락에 꼽는 성광교회의 최연소 장로로 임직 받았다.

 

 또한 군산시에서 기술직 공무원으로 여러 가지 현안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신화를 쌓았으며, 전북도로 전출 가서 ‘군산에서 도에 전출 와서 승진한 사례가 없었다.’는 앞서의 예를 이겨내고 국장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5남매 형제의 맏이로, 두 아들의 아빠이자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으로 돌아왔다.

 

 

 

군산이 배출한 긍정마인드의 ‘형님 리더십’

 

 군산이 배출한 긍정마인드의 공직자, 외유내강의 살아있는 교본으로 불리는 고재찬 전북개발공사 사장이 3년 임기를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그는 어려움 속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그동안의 경험을 군산이라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써주어야 한다.

 

 “제가 스물셋 때 군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본적지도 군산시 선양동 223번지로 옮겼거든요. 전주로 전출 갔을 때도 가깝던 친구들이 전주로 이사 오라고 했지만 저는 군산이 좋아요. 무려 10여년동안 도청 과장을 거쳐 기술직의 꽃이라고 부르는 건설교통국장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군산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말처럼 이제는 뼛속까지 군산사람이다. 능력과 경륜을 가진 그의 이름은 ‘군산의 자산’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는 공직자로서 핵심 요직을 거치면서 업무에 쫓기는 시간을 쪼개 그 어려운 방송통신대를 거쳐 전북대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칠 정도로 학구파이며, 성실함의 아이콘이었다.  2015년말 전북도 건설교통국장으로 퇴임하여 다시 전북개발공사 사장 3년을 더했으니 무려 43년9개월 동안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해 온 셈이다. 

 

 전북개발공사 사장 취임이후 현안사업 추진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면서 어려운 경영 현실을 뛰어넘으려고 직원들과 소통하는 등 ‘형님리더십’으로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의 열정을 보였다.  경영 지표에서 아쉬웠던 전북개발공사는 그의 취임 이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뤄냈다. 내실 있는 경영으로 2015년  276% 였던 부채비율이 2018년에는 112%로 낮아지는 재전건정성을 확보했다. 또한 2015년 1,062억원이었던 자본금을 2018년 1,342억원으로 확충하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개발공사 퇴임사에서 했던 “이제 돌아갈 가정이 있고, 따뜻하게 맞이해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신앙생활에 몸담을 교회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절정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고재찬 사장. 공기업 재임기간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뤄낸 그의 능력과 경륜이 군산지역 사회에 필요한 시기이다. 

 

 

 

군산시 공무원으로 27년 봉직 

 

 임실에서 4년 동안 생활을 하다 군산으로 전출 신청을 한 그는 1979년 4월 16일 군산시 공단사업소로 발령을 받았는데 당시에 엄청난 토목사업인 155만평 임해공단을 조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임실 촌놈소리 듣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고 하였고, 처음부터 배우는 자세로 일했지요.” 

 

 워낙 성실했던 그는 낮에는 현장에서 밤에는 여관에서 일하다가 늦게야 퇴근하는 고된 일과를 계속했다. 그리고 점점 능력을 인정받았다. 공단사업소 근무 이후 수도과, 도시과, 감사당당관실, 건설과에서 근무했다. 6급 급수계장으로 일하던 얼마 후 중앙대 건설대학원 도시관리 과정 3개월 코스에 들어갔다. 

 


 

 

 “마지막 발표 시간에 제가 ‘우리는 대한민국 6급 공무원으로 안 해본 일도 없고 못할 일도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내일을 향해 나가자’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가끔 후배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곤 합니다.” 

 

 1994년 1월 토목직의 가장 선임이라는 도시계획계장을 맡았다. ‘오늘은 퇴근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직원들의 유행어가 될 정도로 도시기본계획 수립, 월명공원 주변 고도제한지구, 미관지구 정비, 도시계획 재정비, 도시계획도로 개설, 토지형질변경 허가 등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3년 동안 일했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도시계획과장을 맡았을 때, 천만평의 산단이 있지만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산단인입철도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워낙 예산이 많이 들어가 국토부나 철도청 모두 손사래를 쳤어요.  ‘산업단지 지원시설로 국비지원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건설교통부 문을 두드렸고, 결국 2003년 예비타당성 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공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작은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남는다는 보람 있는 기억 중의 하나이지요.”

 


 

 

 그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사업은 오늘날 동백대교로 이름 지어진 군장대교 사업이다. 익산국토청과 협의하여 국도 4호선 중 미개설 구간인 군산과 충남을 잇는 구간을 교량으로 연결하는데 합의하였다. 당시 시장과 장관의 면담 일정을 잡느라 힘들었다. 결국 2004년 예비타당성 조사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이 다리를 연결하는 사업이 만들어졌다.

 

 군산의 명물이 된 은파 산책로와 물빛다리 계획을 포함하는 은파국민관광지 개발사업도 이 당시에 했으며, 2004년 ‘근대역사 경관조성 기본계획’ 연구 용역비를 편성하여 오늘날 근대역사 지구로 만들어가는 기초를 세웠다. 그리고 전북도로 전출 신청을 했고 도청 관광진흥과 국제해양담당관으로 새롭게 공직을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예의 기술직 최고봉에 올랐다. 

 

 

 

내 삶을 이끌어 준 성광교회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가족들을 위해 공장 생활을 했던 누나가 신앙의 힘으로 살았거든요.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건 누나의 영향이었던 셈이지요.” 

 


 

 

 1975년 1월 5일 그가 살던 임실군 봉천에 교회가 생겼다. 그리고 전주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 은퇴한 이동휘 목사님을 만났다. 홀어머니와 함께 등록했고 지금까지 그는 가슴 속에 교회를 안고 산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매일 새벽기도로 시작했거든요. 시험 보러갈 때 온 교회가 합심해서 중보기도를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모든 분들에게 은혜를 받았고 모든 분들에게 신세를 졌어요.”

 

 임실에서 군산으로 발령받아 갔을 때 이동휘 목사님의 권유로 성광교회에 나갔다. 공직을 하면서 주일에는 주일하교 교사로 일했으며, 이 때 지금의 아내(박윤서)를 만나 1979년 결혼했다. 

 


 

 

 “어렵고 힘든 공직의 길을 대과없이 마친 건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지금도 피아노학원을 하면서 도와주는 안사람을 볼 때 정말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젠 시간을 갖고 같이 다니면서 못해주었던 것들 해주어야죠.” 

 

 현직에 있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던 가족들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다. “부천에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큰 아들 내외와 서울에서 열심히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는 둘째 아들이 영육간에 건강하고 앞길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45살 때인 2000년 1월 23일 장로로 피택되었고, 11월 23일 성광교회 최연소로 장로에 임직되었다. 장로 임직 20년차를 내다보는 고재찬 장로. 그는 올해 해외선교위원회를 맡아 세계 여러 나라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니 앞으로의 생활은 기독교인으로써의 본분을 다하려는 마음이 크다. 우선 4월에 성광교회에서 계획한 ‘예수님 고향마을 방문’에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다.

 


 

 

 “올해 해외선교위원회를 맡아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아프리카 우간다와 에스와티니를 방문하여 헌당 예배를 주선했고, 네팔의 북서부 지방에 세운 교회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올 여름에 헝가리와 몽골 선교 계획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선교와 관련한 사역이 이제 그의 몫이다. 그의 인생 2막은 종교인 고재찬으로 귀결될 것이며, 그의 성실함을 믿는 하나님도 크게 쓰시리라. 그의 소통리더십이 군산지역을 위해 더 많은 봉사의 발걸음으로 승화될 것이다. 교회 장로로써 무한 봉사의 길을 가는 그의 앞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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