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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상해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1919년 군산 구암동산의 만세운동’
글 : 오성렬 /
2019.03.01 12:49: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3.1운동 및 상해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1919년 군산 구암동산의 만세운동’

글 오성렬(主幹)

 

 

 

 

 

1919년 3월5일, 당시 구암동의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멜볼딘여학교, 구암교회 등이 가세한 가운데 시민들이 동참하여 벌인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대대적 저항운동으로 이후 전북은 물론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문재인 정부는 극악무도했던 일제 치하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며 저항했던 우리 선조들의 결기를 상기하고 그날의 운동이 갖는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잔재를 떨어내는 한편 일제강점기 수형기록 전수조사 등을 통한 국내외 독립유공자 발굴을 위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군산3.5만세운동 약사


군산의 3.5만세운동은 당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전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 매와 태극기를 전달받아 2월26일 군산에 내려온 즉시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 교사를 만난다. 박 교사 집에서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윤관, 김연묵, 이동욱, 문용기 등을 만난 김병수는 서울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도 시위를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의기투합된 이들은 박 교사를 위시한 여러 명의 교사들과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여 매와 많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3월6일 서래장날에 맞춰 일제히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는데 3월5일 새벽 어떻게 알았는지 군산경찰서에서 일본인 경찰 10여 명이 무장을 하고 들이닥쳐 박연세, 이두열 교사 등을 연행해가는 바람에 거사 계획은 좌절될 뻔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은밀히 활동하고 있던 김윤실 교사는 바로 학생 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당일 시위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학생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교,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돌입하자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멜볼딘여학교도 가세하게 된다.

 

또한 구암교회 교인 다수와 궁말 예수병원 사무원이던 양기준, 이준명, 유한종, 양성도, 김창윤, 송경태, 송원경, 임병율, 이진규, 김준관, 이기주, 이재근 등을 비롯하여 시민 중에서도 정문선, 김영상, 전종식, 문재봉, 홍종억, 전봉신, 박동근, 임종우, 이병관 등이 동참함으로써 그 수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천여 명으로 불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당시 군산시 인구는 13,604명(조선인6,581, 일본인6,809, 외국인214)으로 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큰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만세운동은 이로부터 28회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져 연인원 3,700여 명이 참여하는 동안 사망53, 실종72, 부상195명이 발생했는데 이는 호남 최초는 물론이고 한강이남 최초의 거사로서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위 약사에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시 상황을 좀 더 부연 설명하면, 당시 영명학교는 군옥지방은 물론 익산, 부안, 김제 그리고 멀리는 충남 서남부지역에서도 유학을 왔으며 박연세, 이두열 교사 등이 수감됐을 때에는 김윤실, 김수영, 고석주 교사를 위시한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 앞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석방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영명학교 전체 학생 70명 중 절반 이상을 유치장에 잡아넣었고 그 사건 직후 경찰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3월5일 전광석화처럼 만세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당일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열기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재향군인과 익산 헌병대에 지원요청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붙잡힌 사람만도 90여 명에 달했다. 또한 3월 말경에는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 건물에의 방화로 경찰을 놀라게 하였으며 일본인 거주지역인 대화정(영화동)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3월30일에는 다음날 열릴 만세 주동자 공판을 앞두고 야간에 횃불과 태극기를 든 수천 명의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으며 다음날 광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열린 공판 법정으로 일단의 군중이 몰려가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36년이 남긴 것


우리 군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주민 수가 우리 시민 수보다 많을 만큼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타 시도에 비해 빠른 일본화가 진행되었으며 그만큼 그들이 남긴 사회간접자본과 주택 등이 많은 게 사실이고 또한 대농장주들을 앞세운 수탈의 전진기지로서 뼈아픈 고통의 역사가 잔재된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방을 맞은 지 74년에 이르는 우리사회는 아직도 일제 36년을 평가, 규정하는 관점들이 제각각이어서 통일된 국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예컨대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일본이 당시 낙후상태에 있던 우리의 근대화를 앞당겨준 부분도 있으므로 이제 와서 과거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의 공존이 그것이다. 

 


 

 

군산의 3.5만세운동만 해도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역사 인식과 가치판단은 우리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수구와 진보의 이념 논쟁에서도 양보가 없어 후대의 교육에도 혼란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내팽개치거나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는 언제라도 외세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 모두는 해방 후 일제의 식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절대적 원인이다.

 


 

 

진보정부가 들어선 이후 구암동산에 3.1운동 기념탑과 3.1운동100주년 기념관이 설립되는 등 뒤늦게나마 성역화사업이 이뤄지고, 매년 3.1절엔 100년 전 그날의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통해 선조들의 뜨거웠던 독립 쟁취 의지를 체험하고 있는데 동산 꼭대기에 우뚝 세워진 기념탑이 멀리 착취의 현장이었던 옥구 일대와 만경평야, 그리고 수탈의 반출 통로였던 군산항과 서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어떤 감회를 가질지 자못 궁금한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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