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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글 : 조종안 /
2018.12.01 21:26:4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탤런트 김혜자씨 부친 김용택 박사.. 그의 발자취

철거 앞둔 6평짜리 판잣집에서 생애 마감한 김용택 전 사회부 차관

 

1923년 9월 초. 군산학우유학생회(회장 정수영)는 시내 공회당에서 문화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정수영(鄭壽榮) 회장은 <조선인의 경제적 멸망과 그 대책>, 김세라(金世羅) 여사는 <인권은 남녀가 同一>, 김용택(金容澤)은 <정의에 살자>, 정찬홍(鄭燦洪)은 <생활권과 가정의 관계>, 김천파(金天波)는 <사회 운동과 개성>이란 주제로 열변을 토하여 갈채를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25년. 그해 7월 29일 오후 8시 개복동 영신여학원에서 군산지역 청년단체 연합 연설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연설대회 개최 목적은 지역 문화 발전이었다. 사회는 정찬홍이 맡았다. 참가자는 500명에 달했으며, 정사복 경찰들이 연설회장 안팎을 엄중히 경계하는 가운데 진행됐다.

 

개회사에 이어 군산청년회 김창수(金昌洙)가 연설(제목 <현대사회의 해부>) 도중 착취 계급의 무리함을 설파하자 입회 경관이 몇 차례 경고하다 중지를 명하였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군산청년회 김황(金鎤)이 <우리의 설움>이란 제하의 연설에서 약자들(식민지 백성)의 서러움과 경성 수재민 참상을 논하자 경찰관이 중지를 요구했고 결국 해산을 명하였다.

   

격분한 청중들은 ‘해산 이유가 뭐냐!’며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여기저기에서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등 장내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때 김용택이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단상에 올라 “우리 처지로는 구(口)를 개(開) 하면 피 끓는 언론(言論)이 아니 나설 수 없다!”고 외치자 경관이 검속, 사회자 정찬홍과 함께 군산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경찰서로 연행된 김용택과 정찬홍은 두 시간 남짓 조사받고 풀려난다. 유학생으로 고향의 문화 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열혈 청년들. 그중 정찬홍은 광복 후 사학(군산동산학원) 경영자가 되고, 김용택은 중앙부처 관료가 된다.  

 

제1공화국 시절, 사회부차관 3년 역임

 

대한민국 제2호 경제학 박사이자 미군정시절 재무부장(재무부 장관) 대리를 지낸 김용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김용택은 1907년 군산에서 무역업을 하는 김홍두(金洪斗)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홍두는 구복동(현 중앙로 2가)에서 천일상회(天一商會)를 운영하며 군산부 협의회 위원과 군산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다. 그밖에 군산노동공제회 초대 회장, 신간회 군산지회장, 교육후원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자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 높았던 인물로 알려진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용택은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보성중학교, 일본 명치대학, 미국 미시간주 호프 대학을 거쳐 1937년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 무렵 북미유학생총회 이사장과 총회장을 겸했던 그는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도 참여한다. 1940년 귀국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게 된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광복 후 미군정이 시작되자 대학 시절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추천으로 재무부장(재무부 장관) 대리가 되어 조국을 위해 일한다. 공직자로서 모범을 보여준 그는 청렴성과 깔끔한 업무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제1공화국 시절인 1952년 2월 사회부 차관에 발탁된다. 그는 차관에서 이임하는 1955년 2월 거주할 집 한 채마저 없을 정도로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연기자가 된 딸에게 ‘열심히 해보라!’ 격려

 

김용택은 ‘국민엄마’로 알려지는 인기탤런트 김혜자씨 부친이기도 하다. 일설에 따르면 김용택이 길한 태몽을 꾸고 김혜자씨가 태어났다고 한다. 김혜자씨는 서울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으며 초중고는 물론 대학도 서울에서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군산풍물기>(최영 지음)는 “김용택은 나이 열일곱에 두 살 연상의 규수와 결혼한다. 두 딸을 낳은 후 스물두 살 때 유학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15년만인 1940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혜자를 낳는다. 그래서 김혜자는 언니와 15년의 나이차가 난다”고 소개한다. 

 

김혜자씨가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처음 연기자가 됐을 때 어머니와 언니들은 반대했지만, 아버지 김용택은 “훌륭한 연기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으니 열심히 해보라”는 격려와 함께 “명배우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니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해줬다고 한다.

 

 

 

총선에 4차례 도전했으나 국회입성 실패

 

김용택은 1950년대 중반 군산으로 내려온다. 그는 중동 274번지에 자그만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고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활동한다. 당시 중동은 빈촌으로 군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네였다. 평소 과묵했던 김용택은 고향에서 4회(1958년, 1960년, 1963년, 1967년)에 걸쳐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정당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본선에서 쓰디쓴 고배의 잔을 마셔야 했다. 

 

제5대 총선(1960년 민의원 선거) 때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판술(민주당) 후보에게 패한다. 제6대 총선(1963) 때는 여당인 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다. 그러나 제1야당(민정당) 고형곤 후보에게 303표 차로 아깝게 낙선,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다.  

 

이후 군산에는 ‘지난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김용택 박사가 탤런트 김혜자 아버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탤런트 김혜자 고향이 군산이다.’ ‘김혜자는 군산에서 여고를 다녔다’는 등의 뜬소문이 사실처럼 나돌기도 하였다. 이는 두 부녀를 향한 애틋함과 호의적인 민심의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영욕으로 얼룩진 생애, 6평 판잣집에서 마감

 

김용택은 1967년 공화당을 탈당한다. 그 후 서울 회현동 집을 정리하여 은평구 응암동에 판잣집을 마련하고 아내와 어렵게 생계를 이어간다. 김혜자씨가 찾아가 아파트를 사드리겠다고 설득했으나 ‘이만한 집도 없는 친구가 많다. 대봉(大鳳)의 큰 뜻을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며 한사코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혼란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고관댁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던 자유당 시절. 국방부 차관보, 사회부차관 등 그가 거친 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부(富)와 명예를 한꺼번에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강직, 청렴했던 그는 1984년 7월 16일 철거를 앞둔 여섯 평짜리 판잣집에서 영욕으로 얼룩진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가난을 두고 가지만 후회는 없다’였다고 한다. 

 

당시 신문들은 “판잣집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은 화려한 공직을 지내고도 빈궁 속에 생애를 마친 고인의 영정 앞에서 새삼 옷깃을 여몄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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