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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켰습니다! 민주주의, 민주당, 군산시,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켰습니다! 군산시장 출마하는 강성옥 시의원
글 : 매거진군산 편집부 /
2018.02.01 15:38:1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지켰습니다!

민주주의, 민주당, 군산시,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켰습니다!

군산시장 출마하는 강성옥 시의원

 

 

민주주의를 지켰습니다.

 

군산 명산동 네거리, 햇살은 따가웠다. 피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무더위는 아니었다.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해졌다. 19876월이었다. 버스 정류장과 상가는 여느 때와 같았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갔다. 그날이 첫 데이트라도 되는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은 시간을 자꾸 확인했다. 그때 들려오는 구호소리.

 

호헌철폐! 독재타도!”

 

집어등에 몰려드는 물고기처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명산동 네거리로 뛰어들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버스나 택시 기사들은 명산동 시장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스무 살 청년 강성옥씨도 거리를 점거한 대열에 합류했다. 아침마다 아버지가 그에게 한 당부, “시내 나가지 말아라. 시끄러운 데에 끼지 마라는 잊어버렸다.

 

그해 114,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학생이 사망했다. 치안본부는 책상을 탁 치니 박종철 학생이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중앙대병원 오연상 전문의는 물고문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황적준 부검담당의는 고문이 있었음을 밝혔다. 숨죽여있던 시민들의 항의 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졌다. 천지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대통령 전두환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호헌은 법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무슨 법? 당시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 선출방식은 간선제. 국민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몇몇의 손으로 뽑혀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간선제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장기집권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로 사망했다는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안기부, 법무부, 청와대 비서실 등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숨겼다는 사실은 시골사람들까지도 알게 됐다. 군산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했다.

 

69일에는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졌다. 시위는 횃불이 되어 전국에 불을 밝혔다.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도, 버스나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학생들도, 아주머니들도, 어르신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6월 항쟁이었다. 군산 사람들 마음도 뜨겁게 타올랐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늘었다.

 

처음에는 시위 하는 사람이 100명도 안 됐어요. 우리는 오룡동 성당에 모여서 출발했어요. 경찰들이 막으니까 시청까지 전진을 못 했어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매일매일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 경찰을 완전히 밀어내고 시청 앞까지 갔어요. 해방구가 된 거예요.

 

그때 저는 군산대 미대 1학년이었어요. 어릴 때에 만화 따라서 그리다가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강의실에는 자주 못 갔어요.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어냈잖아요. 허무하게도 198712월 대선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거예요.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웃음) 예술가하고 멀어졌어요. 학생회관하고 거리에서만 있었어요.”

 

19901, 강성옥씨가 대학 4학년으로 올라가는 해였다. 민정당(당시 여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국이 ‘3당 합당을 했다. 여소야대에서 벗어난 노태우 정권은 노골적으로 지역주의를 조장했다. 전라도 사람들과 평민당은 섬처럼 고립되었다. 어떤 이는 그때를 두 개의 국민이 존재하던 시기라고 했다. 호남인과 비호남인으로.

 

당시에 3당 합당을 반대했던 노무현 의원. 국회에서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라고 비장하게 손을 치켜들고 발언했다. 전국 곳곳의 사람들도 3당 합당 반대 시위를 벌였다. 강성옥씨는 군산대학교와 군산 시청 앞에서 3당 합당 시위를 주도했다. 국민이 만들어준 당을 버리고, 군부독재의 당에 붙는 정치인들에게 저항했다.

 

강성옥씨의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죄목은 3당 합당 반대 시위. 감옥으로 끌려갔다. 교도소는 복도가 길었다. 방은 한쪽 방향으로만 만들어져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징벌방이 10개쯤 있고, 독방이 몇 개 있었다. 그 다음에 여럿이 지내는 혼거방이었다. 감옥에서 가장 그리운 건 자유. 강성옥씨는 하루에 한 번 주어지는 운동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재판 받으러 갈 때는 수갑 차고 포승줄로도 묶어요. 어머니가 오셨는데 눈을 안 마주쳤어요. ‘민자당 해체하라!’ 구호를 외쳤죠. 판사가 조용히 하라고 해요. (웃음) 그래도 결연한 의지를 보여줘야 하잖아요. 3당 합당은 야합이라는 내용의 최후 진술을 써서 암기했어요. 인터넷이 없던 때라서 자료 준비는 많이 못 했죠. (웃음) 유시민 작가의 항소이유서처럼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못 썼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강성옥씨는 안기부 학원 사찰 반대로 다시 5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제적당한 학교 안에서만 생활했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학교는 텅 비었다. 소리를 질러도 도와주러 올 학생들이 없다. 수배자들이 잡혀가기 딱 좋은 때였다. 그래서 가까운 익산이나 광주, 때로는 더 먼 도시로 피신했다. 집을 빌려준 사람들은 선배의, 친구의, 후배의, 고향 친구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어 준 셈이었다.

 

차디찬 바닥에서 자고 뜨거운 거리에서 20대를 보내고 맞은 30. 김대중 대통령 때에 민주화운동 관련 법령이 생겼다. 강성옥씨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16년 만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학사모를 썼다. 나라에서는 민주화운동 공로자라고 인정까지 해주었다. 군산 교도소를 오가며 수 없이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뒤늦게 닦아드릴 수 있었다.

 

2016, 중년의 강성옥씨는 다시 거리와 광장으로 나갔다. 군사독재만큼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했다. 오래 전에 그가 스무 살이었을 때처럼, 사람들이 밝힌 희망은 전국 곳곳의 거리를 가득 메웠다. 촛불시민들은 나라다운 나라를 갈망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간절함으로 버텼다. 부패한 권력을 탄핵하고, 다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민주당을 지켰습니다.

 

민주당은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의롭게 맞서지 못 했다. 국민들이 민주당에게 준 큰 힘을 쓸 줄 몰랐다. 국민을 위해 싸우지 않는 당이 되어갔다. 호남에서는 5.186월 항쟁의 정신을 새기지 않는 정치인도 민주당의 옷을 입고 당선되었다.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은 점점 찾기 힘들었다. 민심은 그런 민주당에 실망했다. 돌아섰다.

 

2016년 봄, 총선을 앞둔 때였다. 군산시의 현역 국회의원과 시, 도의원들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 만든 국민의당으로 갔다. 민주당 군산지역 위원회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강성옥씨는 소신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당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배신행위처럼 보였다.

 

제가 처음으로 더불어 콘서트를 제안했어요. 그때 민주당에 남은 시의원은 김종숙, 신영자, 김성곤, 강성옥, 이렇게 네 사람뿐이었거든요. 김경구 의원을 복당시켜서 같이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당을 살리고 싶었으니까요. 김철규 전 도의원님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하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더불어 콘서트에 김홍걸, 김빈, 정청래. 손혜원, 진선미, 표창원 의원님 등이 와 주셨어요. 거기 오신 많은 시민들 덕분에 희망을 봤어요.”

 

그러나 군산은 민주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못 했다. 군산시의회에서도 민주당은 제1당의 지위를 국민의당에 내줘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아무리 좋은 조례를 만들어도 쉽게 통과가 안 됐다. 강성옥씨는 민주당 군산시의회 원내대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설득하는 게 힘들었다. 더구나 지역위원장이 없는 군산시 민주당. 강성옥씨는 민주당 사무국장으로 듬직하게 버텼다.

 

201759일 대선, 강성옥씨는 돌아온 민심을 보고 감격했다. 군산시민의 63%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군산시민들은 정통야당의 가치, 민주당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도를 걸어온 민주당의 노력을 알아봐 주었다. 강성옥씨는 그 험난한 길에서 한 번도 이탈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는 군산시의 더불어민주당에도 전화위복이었다. 기득권 세력과 적폐 세력은 중앙에만, 서울에만 있지 않았다. 군산시에도 존재했다. 탈당하고 새로운 당을 따라간 사람들 덕분에 시민들을 위해서 제대로 일하는 민주당이 됐다. 20182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전국 지지율은 50% 안팎이다.

 

군산시를 지켰습니다.

 

강성옥씨는 평범한 시민. 결혼하고, 아빠가 되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급식소 봉사도 가끔씩 다녔다. 파를 씻어서 다듬고, 소고기뭇국에 넣을 무를 썰고, 100인분이 넘는 제육볶음에 들어갈 양념을 만들고, 손잡이가 긴 주걱으로 음식이 타지 않게 저었다. 점심 한끼를 먹기 위해서 일찍 오는 사람들. 음식 장만에 정성을 들였다.

 

평생 남는 기억이 있잖아요. 그날 급식소에서 그랬어요. 유치원 다니던 저희 큰애보다 어린 애기가 엄마랑 반나절을 걸어서 급식소에 왔었어요. 그 애기가 냉면 그릇으로 가득 먹는 밥이 그날 먹는 유일한 한끼래요. 충격을 받았어요. 그 자리에서 정치를 해서 애들에게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죠. 뭔가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했어요.”

 

그의 생각은 군산시의 예산을 나누면 굶는 사람을 줄일 수 있겠다라고 확장되었다. 시의원이 되고는 밥을 나누는 일부터 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군산시의 예산이 돌아가도록 복지에 힘을 썼다. 국가에서 시행하기 전부터 에너지 바우처 사업을 제안하였다.

 

강성옥씨는 약자 중의 약자인 발달장애 성인들을 위해서 조례를 만들었다. 정규과정이 끝나면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해 여는 발달장애성인 평생교육기관’. 올해 4월에 개관한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 청소년, 노인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조례를 만들었다.

 

청소년들과 토론해서 청소년 자치 확대를 위한 조례를 만들었어요. 군산시는 청소년 예산을 책정할 때, 의무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 해요. 청소년들은 모바일 웹을 통해 시 행정에 의견을 낼 수 있죠. 전북대학교 김화수 학생이 찾아와서 같이 노인복지증진에 관한 조례도 만들었어요. 어린이 행복도시 군산을 위한 조례도 만들었고요.”

 

강성옥 의원이 맡은 일은 의회의 예결산위원과 행정복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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