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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뱃길 100년, 그 발자취를 찾아서/ 추억의 뱃길 군산·장항 도선장(1)
글 : 조종안 /
2017.12.01 14:26:2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금강 뱃길 100, 그 발자취를 찾아서/

추억의 뱃길 군산·장항 도선장(1)

 

아득한 그 옛날의 백제 향기를, 푸른 물에 넘실넘실 담뿍 싣고서, 굽이쳐 흘러내린 금강 하류에 즐거운 보금자리···”

 

군산 시내 어느 초등학교 교가(校歌) 앞부분이다.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 강경에서부터 충청·전라 도계를 이루며 흐르는 금강(錦江)은 군산 시내 초··고등학교 대부분 교가에 들어간다. <군산 팔경>에도 네 번이나 등장한다. 이처럼 금강은 역사의 강이요, 군산 시민의 혼이 담긴 강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한강, 낙동강과 함께 남한의 3대 강으로 꼽히는 금강은 물결이 비단처럼 곱고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비단강’ ‘비단물길이라고도 칭하였다. 채만식 소설 제목을 따라 탁류로도 불린다.

 

수많은 산과 들을 에두르고 휘돌면서 천리(401km)를 흘러온 금강. 숨차게 달려온 물줄기는 군산시 중동, 경암동 지역 강기슭에서 용솟음치듯 마지막으로 세차게 굽이친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군산 앞바다에서 서해와 만난다.

 

강 언저리마다 고을이 자리했고 포구가 번창했다. 이 땅에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황포돛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포구마다 보부상이 모여들었고 객주들은 거래를 주선하였다. 조기나 뱅어 파시를 앞두고는 경기도 지역 배들까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언제부터 금강에 여객선이 오갔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군산 개항 전 충남 부여군 입포 마을의 어느 객주가 자신의 황포돛배로 이틀에 한 번씩 군산에서 생활필수품을 구입해 실어 나르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이후 군산-강경을 물때에 맞춰 하루 2회 왕복하는 여객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군산의 다양한 역사를 정리한 책 <군산역사 이야기>(김중규 지음)에 따르면 금강의 첫 번째 여객선은 군산 개항 이듬해(1900) 8월 일본인 기무라(木村)가 한국인 명의를 빌려 정기적으로 운항(군산~강경)을 개시한 8톤급 증기선 강경환(江景丸)25톤급 황산환(黃山丸)으로 기록된다.

 

군산-장항 도선의 변천

 

금강은 지역 문물이 왕래하면서 다양한 역사를 만들어낸 시대의 젖줄이었다. 출퇴근길이자 학업의 길이기도 하였다. 서해안 도서(島嶼) 지역은 물론 충남 장항을 비롯해 서천, 대천, 부여, 논산, 강경, 한산, 화양 등지 학생들이 군산으로 유학을 왔다. 주말이나 방학 시즌이면 군산~강경, 군산~화양 여객선의 절반이 넘는 승객이 학생이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군산도선장(군산-장항)도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항상 붐볐다. 지역 주민들의 발이었던 도선은 경남환, 경남호, 군산호, 서천호, 금강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루 이용객이 수천에서 3만을 헤아리는 시절도 있었으나 8년 전(2009) 운항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애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충남 서천군 마동면 수동리에는 군산 개항(1899) 이전부터 도선장이 있었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 객선이 드나들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에도 도선(군산-수동리)이 정기적으로 운항하였다. 당시 도선은 향교 재산으로 경영하였으나 대정 7(1918) 군산에 사는 일본인 송본시오랑(松本市五郞)에게 운영권이 넘어간다.

 

대정 11(1922)에는 도선(군산-수동리) 운영권이 군산부(군산시)로 넘어간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30년 봄 군산부는 조선경남철도(朝鮮京南鐵道) 주식회사에 경영권을 양도한다는 구실로 부() 협의회를 개최한다. 외면상으로는 경영권 양도이지만, 눈속임이었다. 군산부가 거액을 받고 팔아넘긴다는 소문을 접한 서천 군민들은 결의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서천 주민들은 도선 경영권을 영리회사에 양도하는 것은 도선 본래 취지를 몰각(沒却)하는 처사라며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결사 항쟁으로 맞섰다. 그러나 경영권은 조선경남철도회사로 넘어간다. 서천군 마동면은 수영(죽산진)이 있던 곳으로 군산과는 지역적 연계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19261112, 군산 부청은 회의에서 대정 15년도(1926) 추가경정 예산안을 이의 없이 가결한다. 그리고 주요과제 11건을 토의한다. 주요과제 11건 중에는 군산 개항 30주년 기념 공진회 개최, 전북~충남 도선(渡船) 잔교 신설과 객선 대형화 추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군산~장항 정기여객선 사업은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충남 장항-전북 군산 여객선 사업은 1934년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다. 사업주는 사설철도 회사인 조선경남철도 주식회사였다. 객선은 경남환(京南丸)과 군산환(群山丸)으로 두 척 모두 중유를 원료로 하는 발동선이었다. 도선은 하루 8~10회 운항했다. 승객도 3천 명을 웃돌았다. 도선 요금은 편도 8전이었다.

 

도선 왕복 요금은 16. 국밥 한 그릇에 10전이던 시절이니 16전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군산상공회의소에서 10전으로 인하할 것을 권고했으나 헛수고. 그럼에도 승객은 해가 다르게 증가하였다. 운항 횟수도 13회로 늘어났다. 1930년대 당시 도선장 부근은 일본인들 거주지이자 군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장항역과 군산항역이 193181일 동시에 영업을 개시했으니 도선 승객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장항역은 충남선(장항선) 종착역이었고, 도선장 뒤편에 자리한 군산항역은 군산-전주를 오가는 협궤열차(경전철) 시발역이었다. 1935년에는 조선에서 유일한 부영(府營) 철도인 서빈 철도가 개통되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일제가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고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중유 구입난이 심각해지자 도선도 감행(減行)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는 1943121일 군산항역이 모든 운송기능을 부두화물역에 남겨주고 문을 내리면서 군산도선장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광복 후에는 군산시가 금동에 도선사업소, 장항에 도선출장소를 설치하고 직영하였다. 1984년 군산시와 서천군이 73 공동 지분(자본금 97천여만 원)으로 금강도선공사를 설립한다. 2001년 정부의 지방공기업 민영화 지침에 따라 공개매각 절차를 거쳐 월명토건이 인수, 운영하다가 승객 감소로 2009111일부터 운항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른다.

 

운항 마지막 날(1031) 도선 요금은 어른(·고등학생 포함) 2000, 소인(3세 이상 초등학생) 1000, 대인+자전거 4000, 소인+자전거 3000, 대인+오토바이 6000원이었다. 지금은 여객선 운항 관련 업무가 일절 없으며, 서천호 선착장 잔교와 군산호, 안창호 등이 이용했던 선착장만 덩그러니 방치돼 있을 뿐이다. (계속)

 

12월호 <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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