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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보선창 생선 도둑을 '갈매기'라 부른 까닭은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째보선창 100년 (3)
글 : 조종안 /
2017.10.01 13:28:3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째보선창 생선 도둑을 '갈매기'라 부른 까닭은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째보선창 100(3)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옹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이밀렸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번쩍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

 

강안(江岸)으로 뻗친 찻길에서는 꽁지 빠진 참새같이 방정맞게 생긴 기관차가 경망스럽게 달려다니면서, 빽빽 성급한 소리를 지른다. 그럴라치면 멀찍이 강심에서는 커다랗게 드러누운 기선이, 가끔가다가 우웅 하고 내숭스럽게 대답을 한다. 준설선이 저보다도 큰 크레인을 무겁게 들먹거리면서 시커먼 개흙을 파 올린다. 마도로스의 정취는 없어도 항구는 분주하다.”

 

군산을 배경으로 1930년대 식민지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채만식 소설 <탁류>의 앞부분이다. 해마다 5월 초순이면 조기 파시가 섰던 째보선창 풍경을 그리고 있다. 특히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는 대목과 "준설선이 저보다도 큰 크레인을 무겁게 들먹거리면서 시커먼 개흙을 퍼 올린다."는 대목은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놀라운 것은 50~60년대 선창 분위기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출어했던 배들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기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날이면 째보선창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선주와 어부 가족들, 만선을 축하해주러 나온 친구들 그리고 볏짚으로 조기를 엮는 아낙들, 짐꾼들, 구경꾼들, 행상들까지 모여들었다. 아랫녘(전남)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뒤섞인 아낙들의 걸쭉한 수다는 어부들이 배에서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어우러지면서 흥을 돋우는 추임새가 되어 주었다.

 

"뱃사람들은 원래 목소리가 커요. 왜냐. 바닥(바다)에서 일을 할라믄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을 수 있어서 클 수밖에 없죠. 째보선창 파출소 뒤에 대폿집이 많았는디, 거기서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우리 대화를 듣고 '뱃놈들이 술 마시고 있구나!' 하고는 들어와서 얼큰하게 걸치고 갔죠. 그래서 '뱃사람에게 술 얻어 마시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내려오죠. 그만큼 선창이 풍성풍성 잘 돌아갔다는 얘깁니다. '뱃놈이 버는 돈은 자식 먹이기도 아깝다.'는 말이 있듯 어부들 생활은 모질었지만, 인정은 많았죠."- (임성식 전 군산시수협조합장)

 

고깃배 대부분이 무동력선이던 시절, 입하(立夏)를 앞두고 째보선창에 나가면 조기가 지천이었다. 이때가 되면 소금배, 상고선, 화목선(장작배) 등도 바쁘게 드나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조금을 전후해서는 어부들 씀씀이도 푼푼했다. 철도와 어판장 주변에 설치된 건조대에 줄줄이 매달려 파시를 노래하는 오통통한 굴비들은 풍요 그 자체였다. '째보선창에 가면 강아지도 1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부둣가는 인심도 후했다. 선주나 중매인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나 구경나온 동네 이웃에게 "금방 잡아 온 것잉게 물(선도) 좋을 때 맛이나 보라고!"라면서 팔뚝만 한 황금빛 조기 몇 마리를 포대에 담아주는 게 인사였다.

 

어부들이 잡아 온 조기는 어판장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거나 대광주리에 담아 경매했다. 그러한 방식은 어상자가 등장하는 1970년대 초까지 이뤄졌다. 경매가 끝나면 중매인과 대매인(중매인에게 수수료를 주고 구매하는 중간상) 등을 통해 기차나 트럭, 생선 장수 아낙들의 다라이(함지박)로 옮겨져 각지로 팔려나갔다. 생선과 소금을 짐자전거에 싣고 농촌을 찾아다니며 곡식과 맞바꾸는 물물거래 방식을 병행하는 행상도 많았다.

 

모두가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 군산에는 '째보선창 갈매기'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부둣가에서 '생선 도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어판장 바닥에 쌓아놓은 생선 무더기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피다가 경비가 눈을 돌리는 사이 재빨리 다가가 허리춤에 감추고 있던 갈고리로 생선 몇 마리를 게 눈 감추듯 찍어 달아났다.

 

지역 사투리를 섞어 '갈마구 행님들'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별명은 선주(船主)들이 지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어부들이 험한 파도와 싸우며 잡아 온 생선을 훔쳤다고 하지만, 생계형 좀도둑에게 '도둑'이란 딱지를 붙이기에는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망망대해에서 작업하는 어부들에게 친구도 되어주고 '어군탐지기' 역할도 해줬던 갈매기에 빗대 불러서다. 안타까운 별명이긴 하지만 풍자와 해학, 여유가 느껴진다.

 

충청·전라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금강(錦江)은 지역 문물이 왕래하면서 다양한 역사를 만들어낸 시대의 젖줄이었다. 출퇴근길이자 학업의 길이기도 하였다. 충남 부여, 논산, 강경, 한산, 화양, 서천, 대천 등지 학생들이 군산으로 유학을 왔다. 도선장(군산-장항)은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매일 붐볐고, 주말이나 방학 시즌이면 군산~강경, 군산~화양 여객선 승객의 절반 이상이 학생이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충청도는 물론 전북 서해안 도서(島嶼) 지역을 오가는 여객선 선착장도 째보선창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인숙 골목도 진즉 생겨났다. 여인숙은 해안파출소와 신영동 구시장 부근에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고군산여인숙, 한산여인숙, 충남여인숙, 강경여인숙, 선유도여인숙 등 지명이 들어간 간판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하숙을 하거나 자취하는 학생도 째보선창과 가까운 중동, 금암동 등에 많이 살았다.

 

조정래의 <아리랑> 고은의 <만인보>에도 등장

 

째보선창은 망둥이낚시로도 이름이 높았다. 수심이 꽤 깊어 농어, 민어 등 고급어종도 잡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정이 달라진다. 기록에 따르면 1975년 당시 째보선창 부근 공장들은 유독성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국은 아무런 공해측정 기구도 없이 1년에 한 번씩 눈으로 보고 다니며 공해 여부를 조사할 뿐이었다. 째보선창 매립은 종합어시장 신축과 산업도로(해망로) 확장공사가 원인이었으나 강물 오염도 한몫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지적이다.

 

"군산시 수협은 올부터 79년까지 총사업비 44천여만 원을 들여 시내 금암동에 있는 서부위판장의 판매장과 접안장을 확장하는 등 대단위 종합어시장을 세울 계획이다. 군산시 수협조합(전 군산어업조합)에 의하면 군산시가 준공예정인 속칭 '째보선창' 매립지 1500평을 22천만 원에 매입, 이곳에 21천여만 원을 들여 500평의 위판장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1978125일 치 <매일경제>

 

위에서 말하듯 째보선창은 1978년 매립된다. 군산시수협조합 위판장 부지를 제외한 매립지가 지금의 공용주차장이다. 복개 전에는 소설 <탁류> 기념 빗돌이 세워진 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기념 빗돌 옆에는 다리(금암교)가 있었다. <탁류> 주인공 정주사가 용댕이(장항)에서 똑딱선을 타고 군산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자 신세를 한탄하며 자살을 생각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아리랑>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보름이가 서무룡의 도움으로 떡장수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역시 떡장사는 째보선창이 가장 잘된다는 것이었다. "자리야 걱정 말고 아무 때고 나오라등마." 손판석이 보름이와 부안댁에게 전해 준 서무룡의 말이었다. 보름이가 떡함지를 이고 나가는 날 서무룡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의 부하 둘이 보름이를 맞이해서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 자리가 제일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보름이는 나중에야 알았다. 주먹패들은 보름이한테서는 자릿세를 받아가지 않았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서

 

째보선창은 고은 시인의 대하시집 <만인보>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쌍욕을 육자배기처럼 질펀하게 내뱉는 '째보선창 주모(酒母)'와 뱅어잡이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 '째보선창 천씨' 실컷 얻어맞고도 낄낄 웃는 '째보선창 갑술이' 등이다. 실제로 1·4후퇴 때(19511) 중학교 4학년이던 고은이 아버지를 따라 돛이 둘 달린 목선을 빌려 타고 피난길에 올랐던 곳이 째보선창이었다.

 

 

 

"나는 자드락종이 한 다발과 옥편(玉篇) 그리고 지리부도와 이태준의 <문장독본>과 잉크와 철필을 챙겨 짐 속에 꾸려 넣었다. 화가가 되리라는 내 꿈은 이런 전란으로 사라져갔다. 그대신 시인이 될 꿈이 더 크게 익어간 것이다. 아침나절에 군산 내항의 어선 부두인 째보선창에 도착했다. 돛대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립(林立)'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중선(안강망) 쌍돛대, 세 돛대의 배들이 거의 항구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 4백 평 정도의 선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고은 시인의 <나의 山河 나의 삶>에서

 

광복 후 째보선창은 군산어업조함(동부어판장)을 비롯해 해안파출소, 장작 거리, 여인숙 골목 등을 끼고 있었다. 선구점, 철공소, 용접소, 젖당꼬 등이 즐비했다. 쌀장수, 물장수, 떡장수, 팥죽장수, 모주 장수 등 노점상들이 길목 대부분을 차지해 조금 때는 장속을 이뤘다. 선창가 열두냥짜리 인생들인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아낙이 가득 퍼주는 팥죽 한 그릇 아니면 새콤달콤한 모주 한 대접으로 허기를 달랬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쇠머리찰떡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맛이 좋았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더하는 검정콩이 결을 따라 줄줄이 박혀 있어 '기름 바른 콩떡'으로도 불리었다. 떡을 마름모꼴 모양으로 썰어 떡판에 쌓아놓으면 반짝반짝 빛나서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다. 재료가 찹쌀이어서 식감이 쫄깃하고 입안에 착착 감겨 가장 인기 좋은 먹을거리로 대우받았다.

 

선창에 가면 철공소가 많았고, 부근에는 용접소도 있었다. 용접소에서 사용하는 암모니아 가스찌꺼기는 아이들 놀이의 재료가 되었다. 가스통에 남은 찌꺼기(가스)를 길가에 버리면 가져다 가스불놀이를 했다. 비오는 날 진흙을 모아 무덤처럼 만들어 그 속에 넣고 구멍을 내면 활화산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또 그곳에 성냥불을 가까이 하면 불꽃이 솟았는데 신기해서 탄성을 지르곤 하였다.

 

죽성포, 어제와 오늘

 

위는 군산 개항(1899) 1년 전, 당시 옥구 감리가 그린 지금의 원도심권 지도이다. 왼쪽 하단 산(石山) 표시와 초가 다섯 채가 그려진 촌락(동그라미 표시)이 죽성포구이다. 조선 시대 편찬된 <옥구군지>에서도 죽성포구와 대밭이 발견된다. 그 대밭이 성()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했다고 전한다.

 

촌락 왼쪽 검은색으로 표시된 지류가 일명 세느강이다. 세느강을 거슬러 조금 올라가면 철교(내항선)를 만난다. 이곳 역시 오래전 메워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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