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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호국 정신 바르게 알아야!” 군산문화원 이진원 원장이 말하는 군산 지역 추모행사
글 : 조종안 /
2018.10.01 13:26:1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선조들의 호국 정신 바르게 알아야!”

군산문화원 이진원 원장이 말하는 군산 지역 추모행사

 

금강(錦江) 하구와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군산시 성산면 소재 오성산(227m). 이곳 산정에서는 나라를 위해 의연히 목숨을 바친 백제 다섯 노인(五聖人)의 호국 충절 정신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매년 개최된다. 지난 28() 열린 제27회 오성문화제전(아래 오성제)에도 많은 시민과 충남 부여의 은산 별신제주역들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이날 오성제는 성산면 주민들로 구성된 고살매농악단의 흥겨운 풍물 한바탕이 식전행사로 펼쳐졌다. 이어 제1부는 종묘제례악 연주가 은은하게 흐르는 가운데 봉제 선언, 신위 봉안, 헌공다례, 초헌례·아헌례·종헌례, 독축, 헌시 낭송, 헌화, 오성인 혼풀이 순으로 진행됐다. 2부는 개막식, 3부는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치러졌다.

 





선인들의 충절과 호국 정신 기리는 추모행사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서기 660년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오성산에 군사를 주둔하고 짙은 안개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섯 노인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사비(부여)로 가는 길을 묻자 '너희가 우리나라를 치러 왔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 줄 것이냐' 하고 항거하였다. 격분한 소정방은 노인들을 참살하였고, 회군할 때 이들의 충절을 기이하게 여기고 오성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군산문화원 이진원 원장은 백제 다섯 노인의 숭고한 희생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라며 군산은 일찍이 당나라와 왜구의 침입을 수차례 받았고,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로 수난을 겪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호국 정신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임준 군산시장은 "오성문화제전은 우리 고장 선인들의 충혼이 서린 기상을 드높이고 우국 충절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 있는 행사"라며 "아무쪼록 문화가 흐르는 관광도시 군산의 전통 행사로 자리매김하여 시민의 화합과 단결을 촉진하고. 군산발전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했다.

 

군산문화원은 군산 지역 선인들의 충절과 호국 정신을 기리는 추모 행사(5~6)를 해마다 주최 및 주관하고 있다. 그중 매년 이맘때 열리는 오성제를 비롯해 최호 장군 시민추모제’(5),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6), 옥구농민항일항쟁(11)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진포대첩 재현행사는 격년제, 중동 당산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열린다.

 

그중 진포대첩, 최호 장군, 임병찬 의병장, 옥구농민항쟁 관련 약사를 모아 정리하였다.

 

태조 이성계와도 인연 깊은 진포대첩

 

진포대첩은 고려 우왕 6(1380) 대선단을 이끌고 호남지역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금강 하구 진포(고려 시대 군산의 지명)에 침입한 왜구들을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화포를 이용해 격퇴한 해전(海戰)이다.

 

왜구들의 한반도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피해도 적잖았다. 왜구들은 1350년경부터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해안 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개성까지 올라가 고려 왕조를 위협하였다.

13808(음력)에는 진포로 침입, 배들을 밧줄로 묶어 놓고, 군사들에게 지키게 한 다음, 1만여 대군이 상륙하여 재물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화약 무기를 적재한 함선 100여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지시하였다. 최무선 장군이 이끄는 고려 수군은 적선 500여척을 소각시키고 백성을 구출하였다.

 

진포대첩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도 인연이 깊다. 그 기록은 군산의 진포대첩 기념탑과 남원 황산대첩 기념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황산대첩은 그해(1380) 9월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진포에서 퇴각한 왜구 잔당을 남원 운봉(황산)에서 섬멸시킨 전투를 일컫는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는 훗날 조선 건국의 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최호(崔湖) 장군 시민추모제

 

최호 장군은 조선 중종 31(1536) 지금의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머니가 장군을 잉태했을 때 넓은 호수에서 백마가 놀다가 집안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꿈을 꾸었기에 호수 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무장이었던 아버지(최한정 장군)에게 글과 무예를 익힌다. 선조 7(1574)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9(1576) 무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이후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왜군 정예부대의 진격을 차단하는 등 국권 수호의 공을 세운다.

 

선조 29(1596)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정유재란 중인 1597이몽학의 난평정에 공을 세우고, 원균 통제사가 이끄는 연합함대의 부산 해전 선봉장으로 선전하였다. 그해 칠천량(漆川粱) 해전에서는 적의 야습을 분석하여 주력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왜군의 집중포화를 받아 장렬히 순국하였다. 당시 나이 62.

 

장군은 선조 37(1604) 청난공신 이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 의금부사로 추증된다. 시호는 충원공(忠元公)이며 사당을 충의사(忠義祠)로 명하였다. 최호 장군 유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32) 유물관에는 선조가 하사한 삼인보검(三寅寶劍)이 보존되고 있으며 장군의 우국 충절 정신을 기리는 시민추모제가 충의사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贊) 의병장

 

돈헌 임병찬(1851~1916) 의병장은 39세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 절제사로 농정에 공을 세웠다. 고을 주민들이 사례했으나 거절하였고, 비를 세우는 것조차 만류하였다. 1906년 전북 최초로 항일 구국투쟁(병오창의)을 지휘하였고, 국권침탈 이후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독립의군부를 조직,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1910) 이후 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장에 올라 구국 투쟁을 전개하다가 19146월 일경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고 단식을 감행하다가 19165월 순절하였다.

 

이진원 원장은 "돈헌 임병찬 선생은 철종 2(1851) 2월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한학을 통달했으며, 16세 때 전주 지방시에서 수석 합격을 했지만, 생계가 어려워 사역(使役)에 종사했다. 1888년 호남에 대 흉년이 들자 가세가 빈궁한 중에도 전 재산을 털어 긍휼에 나서기도 했던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라고 말한다.

 

이 원장은 임병찬 선생이 구국의 일념으로 자결하신 지 100년 넘게 지난 지금, 그 위대한 정신이 계승 발전되기는커녕, 선생이 군산 출신이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시민이 많아 안타깝다.”라며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 민주국가를 세운 것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열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라고 덧붙인다.

 

옥구농민 항일항쟁(이엽사 농장 소작쟁의)

 

이진원 원장은 옥구농민 항일항쟁은 일본인 농장주들의 혹독한 착취와 일경의 폭압에 항거한 우리나라 농민저항 운동사의 대표적인 항쟁이라며 당시 군산 지역 농민들의 봉기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대단히 크다. 조상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이어받고 얼을 되새기고자 매년 행사를 갖는다.”라고 소개한다.

 

192711월 옥구군(군산시) 서수면 이엽사농장은 조선인 소작농들에게 75%의 소작료를 요구한다. 이에 장태성이 교섭위원으로 나서 소작료를 45%로 조정해 줄 것(당시 전국 평균 소작료 48%, 전북지역 42%~46%였음) 포장은 비싼 가마니보다 ''으로 할 것 등을 제의했으나 무시당한다. 장태성은 임시총회를 열어 불납을 결의하고 다시 방문하여 호소하였다. 이에 농장 측이 공갈·협박하자 정식으로 내지 않겠다는 뜻을 통고한다.

 

농장 측 신고를 받은 경찰이 장태성을 포박, 임피역 주재소에 유치했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들은 야밤에 500여 명이 삼거리에 집결, '장태성 석방'을 외치며 궐기하였다. 격분한 농민들은 주재소 기물을 파괴하고 장태성을 구출한다. 경찰은 주재소를 습격한 조합원 중 30명을 압송하는데, 그해 1129일 치 <동아일보>'군산·옥구는 계엄 상태'라고 보도하였다.

 

강제 진압을 당한 소작인들은 일본인 농장주에게 농지를 몰수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난다. 경찰은 소작쟁의 관련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하였고, 34명이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른다. 한편 34명 중 18명은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지정, 서훈을 받았다. 1994년 건립된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비 부근은 200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 시설로 공식 지정됐다.

 

 

군산문화원

주소: 전북 군산시 나운1796 열기전북 군산시 나운1796

도로명: 전북 군산시 대학로 330

전화: 063-45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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