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도심 속의 외딴 섬, 중동 골목을 가다 『백 굽이 골목, 천개의 얼굴』
글 : 이진우 /
2018.04.01 11:20:3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도심 속의 외딴 섬, 중동 골목을 가다

백 굽이 골목, 천개의 얼굴

 

 
 

굴곡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미로처럼 얽힌 이 골목길은 얽히고설킨 우리네 삶을 닮았다. 나는 오늘 내세울게 없어서 서러운 이들의 노곤한 삶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 폭풍우 치는 거친 항로처럼 여기는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면 나오기가 여간 힘들었던 군산의 대표적인 골목동네.

문간을 나서면 바로 이웃집 부엌이었고, 골목을 돌면 옆 집 안방이 마중을 나왔다. 생선 상자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을 나서면 다른 집 대문이 막아섰던 마당 없는 집들. 집과 집, 사람과 사람이 옹색하게 마주보고 섰던 그런 오밀조밀한 동네였다. 그래서 중동을 걸을 때는 보폭을 좁게, 느낌은 어설퍼야 제격이다.

오늘 바라보는 중동은 낯선 이질감이다. 좁고 올망졸망한 골목과 골목, 실핏줄처럼 이어졌던 골목의 한가운데를 소방도로가 싹툭 잘라버렸다. 퉁퉁 부은 얼굴에 분칠을 한 아낙네의 얼굴색이었을까. 샛길과 샛길 사이에서 새 단장에 여념 없는 담벽은 회색 위로 덧칠한 흰색의 부조화가 묘한 표정이다.

 

<중동의 다른 이름 274번지>

 


 

큰길 옆에 가로 세로 엇갈려 닥지닥지 붙은 집들마다 어둡고 슬프다. 염원할 게 많아서인지 이 골목에는 유난히 당집이 많다. 붉고 흰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고 만신이 내려와 구원의 말씀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그 당집 많은 길을 걷는다.

암울했던 그날의 얼굴들이 색 바랜 나무 문짝이나 양철 지붕 아래 슬쩍 슬쩍 엿보이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휘휘 돌아 나가자 옆집 오줌 싸는 소리도 훤히 들릴 정도로 찰싹 붙어 있던 삶들이 깨진 창틀 안에 그대로 서 있다. 요즘 같으면 자식들도 인권을 보장하라고 데모 일으킬 정도로 사생활이 없었던 게 바로 중동이다. 이 동네의 다른 이름은 274번지이다.

 

멀리 떠나간 군산역을 생각하면서 구시장 녹슨 건널목을 지나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우풍화학 터를 지나쳤다. 우물 하나에 수십 가구가 입을 대고 살던 그 시절, ‘위세를 떨쳤던 이른바 수돗물 집흔적이 멀리 보였다. 만화방이 있던 자리는 헐리고, 여러 갈래 샛길로 갈라졌던 골목은 이제 휑하니 빈 터로 남았다. 눈길을 둘 데가 마땅치 않은 밑바닥부터의 변화에 내내 섭섭했다.

승리장여관 사거리에서 선창 쪽을 바라보면 금암장이다. 큰 선단을 이끌던 선주가 살았던 집이다. 만신이 내리던 날이 깃발로 날리는 점 집 앞이 동화택시 창고 건물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택시회사 건물은 철지난 옷을 한 겹 더 껴입은 듯이 우중충하다.

세월이 한참 비껴 선 색 바랜 담장 아래 몇 무더기의 잡초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터벅터벅 걷는다. 가난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절이었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고 질기게 견뎌온 지난날들이 발끝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중동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며 닭장 같았던 이 골목의 시름과 아린 추억을 한 올씩 건져 올렸다. 이젠 희미해지는 기억처럼 꺾어지는 골목의 숫자도 훨씬 줄어들었지만 그런다고 중동 골목이 아닐까. 어제를 지나서 오늘이 있듯이 중동은 질경이처럼 간절함이 있었다.

 

오늘 나는, ‘언젠가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하며 살았던 그날들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 놓는다. 선우합판에서 경암동 사거리로 난 길 옆, 포플러 잎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하오의 햇살이 눈부셨다. 그렇구나, 잘산다는 건 오롯이 나의 눈높이였을 뿐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순심이 누나, 덕순이, 영심이, 순덕이 등 동네 처녀들은 합판공장의 공순이가 되어 있었다. 그 어렵던 시절을 살아 온 여자들은 모두 이런 아득했던 가난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아득했던 중동 274번지 시대는 모두가 힘들었고, 모두가 대단했다.

오늘 나는 중동 골목을 걸으면서 그렇구나, 이런 절절한 삶의 아픔들이 발 닿은 자리마다 스며들어 있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휘어진 골목을 돌 때마다 그래 누군들 우여곡절 없는 삶이 있을까’, ‘그런 이유많은 사연들이 이렇게 휘돌아가게 만들지 않았을까떠올렸다.

신은 이겨낼 만큼의 아픔과 시련을 준다는 걸 마음에 새기면서 걸어가는 중동 274번지 길이다.

 

<중동의 랜드마크, 돌산>

 

 

 

돌산은 중동의 랜드마크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돌산의 엄숙한 표정과 위압감은 중동사람들의 가슴에 오롯이 남겨져 있으리라. 새로 지은 아파트와 신축 공사현장을 가르는 구시장에서 경찰서 쪽 대로변을 따라 돌산 옆 목재소를 돌아 나간다. 이 험한 길을 지나면 아늑한 휴식이 반겨줄 것을 기대하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예전 남포(화약으로 폭파)가 터질 때면 돌산 정상쯤에 걸린 확성기에서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몸을 피했으며, 지금으로 치면 소음, 균열, 진동 민원으로 엄두도 내지 못할 도심 한 가운데서의 발파가 쓱싹 이뤄졌다.

돌산 아랫동네는 집을 내놔도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정회네 집도 기억자로 꺾이는 큰 대문 집이었다. 덩치가 황소같던 녀석은 눈망울이 순했다. 어쩌다가 발파에 날아온 돌이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아이가 태어나 꿈을 키웠고,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루며 살아나갔다.

 

밤하늘에 유성의 긴 꼬리가 금을 그어놓듯이 기억 속의 돌산은 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중동사거리에서 돌산 옆 길 중동호떡을 향하여 난 휘영청 휜 2차선을 따라 걷는다.

예전 군산역 기찻길 옆 돌산은 옛 신화나 전설에 나올만한 표정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오가는 이들의 눈 앞을 떡 하니 가로막고 섰다. 석재를 채석하여 철도청 공사에 쓰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신성한 산을 허문다 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그런 도심 한 가운데의 산이었다. 물론 도심 속에서 화약을 사용한 발파라니... 암울했던 70~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중동호떡집 옆 사잇길로 들어서면 예전에 군산역 철조망이었다. 지금은 역이 내흥동으로 이전했고, 돌산 자리에서는 아파트 신축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세월은 추억을 기다리지 않았고 개발의 시위를 당겨버렸다. 그래도 중동 호떡집은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따끈한 흑설탕물로 우리의 입맛을 간질이고 있다.

 

고학생이 많았던 시절, 익산·전주 방향 통근 열차를 이용해 단거리 유학하는 학생들도 꽤 되었다. 표 사기도 어려운 가난한 통학생들이기에 일명 떼뽀차(표 안내고 타는 차를 이름 하는 말)’가 일상이었다.

열차가 종착역인 군산역으로 진입하면서 속도를 늦추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학생들이 우르르 기차에서 휙 날라 착지하여 잽싸게 역 반대편 철조망 밑으로 기어 달아났다. 그래서 돌산은 도망가는 길을 내준 산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그 돌산을 돌아 나오면 문짝을 만들어 팔던 문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 곳에서부터 중동의 다른 골목길은 시작되고, 아슬했던 시련과 고독의 시절이 이어졌다. 그런 돌산의 뒷담화를 생각하면서 여인네의 굴곡처럼 슬며시 꺽어지는 문짝집들이 늘어선 샛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느 시골 아낙네의 분칠처럼 어울리지 않게 하얗게 칠해놓은 외벽이 새삼스럽다.

언젠가 돌산의 정상 부분을 발파를 하면서, ‘터널처럼 구멍이 뚫리면 남북통일이 된다.’는 소문이 전염병처럼 퍼지기도 했다. 소문대로 제대로 아치 모습을 한 돌산의 모습이 생겼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남북통일은 아직 그대이다.

지하 깊숙이 뚫어지던 돌산의 발파 현장이 자꾸 중동호떡집 쪽으로 옮겨 갔다. 어느 땐가 돌산의 정상 부분에 있었던 이른바 당집들도 허물어졌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90년대 들어서면서 돌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도 몇 년쯤은 지하로 돌을 채석하기도 하였지만 멀리서 보아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던 돌산은 기억에서만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

 

당당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돌산은 그래서 중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돌산을 뛰어 다니면서 하루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높이만 보였던 그 산으로 인하여 때로는 위압감을 느끼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호연지기를 품기도 했었다. 누구는 그 돌로 인하여 부자가 되기도 했겠지만, 중동에서 어렵고 힘든 날을 보냈던 이들에게 돌산은 뛰어 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돌산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년만년 변할 것 같지 않던 산도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백 굽이 골목, 천개의 얼굴>

 


 

굽이굽이 돌면 이어지고 끊긴 것 같으면 또 이어지는 미로같은 골목. 중동은 그래서 백굽이의 골목에서 천개의 얼굴이 나타난다. 한 굽이돌면 정호네 집이고, 또 한 번 꺾어지면 순정이네 집. 꺾어질 때마다 낯익은 얼굴들이 그려지는 그런 골목이다.

골목마다 하루를 여는 소리, 혹은 하루를 후회하는 소리, 또 어느 집에선 꺽꺽우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물고 설움이 설움을 이어가는 아스라한 삶이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는 게 또한 이 곳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똑같은 인생이 없듯이 이 골목의 삶 또한 각자의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보통 사람들의 꿈이 중동에서도 하나씩 익어가고 있었다.

 

오늘 나는, 골목 수만큼이나 정이 깊었던 중동의 한가운데를 걸으면서 사람의 향기를 맡는다. 헐겁게 늘어진 쪽문과 무너져 내리는 담장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지붕을 보면서 그렇구나, 우리네 삶이나 중동의 아스라한 삶이나 색깔이 다르지 않구나 깨닫는다. 정규네 집을 지나 수돗물을 나눠주었던 큰 길 옆집을 지났다. 길은 새로 났고 옛길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기고 있다. 그 길의 흔적을 들추면서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하여 한 발씩 내딛었던 그 시절을 되새겼다.

교복 입고 나서는 친구들을 보고 골목 한 켠으로 피했던 순자. 어판장에 나가 일당 막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철호. 합판 공장에서 일하면서 청구여상에 나가 끝까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미정이. 그들에겐 중동 골목은 희망의 언덕이었다.

막막한 일상이었지만 꿈을 꾼다는 하나만으로도 모든 시름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 중심은 언제나 골목의 정이었음을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꿈을 키우고, 그 꿈에 색을 칠하고 물을 주면서 아슴아슴 키워왔던 그 간절한 삶이 발끝에 전해져 왔다.

 

그래서 중동은 간절함이다. 그 꿈 많던 골목길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물론 천개의 얼굴, 천 가지의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중동을 떠났지만 말이다.

중동은 갈래갈래 들어 선 골목길의 대명사이다. 골목마다 한숨이 서려 있으며, 돌아가는 자리마다 애환과 시름이 잠겨 있다. 그 깊고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자라났고, 골목의 시련을 딛고 일어 선 이른바 잡초같은 인생들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유성상회 옆길을 나서면서 중동 사람들의 삶에는 생명력이 있었음을 느낀다. 중동 골목의 사람들은 끈질기게 성장해 나가는 선인장과 같이 척박한 땅이지만 누굴 탓할 것도 없이 스스로 이겨내 왔다. 그래서 굽이진 골목을 돌아 나올 때마다 새로운 희망이 다가서듯 새로운 그림들이 만들어졌다. 물론 화려할 것이라곤 없는 빈집들의 꿈이지만, 소시민적인 삶의 흔적이 나름의 정취로 남아 있다.

 

<연탄, 그것은 양식>

 


 

얼마쯤은 연탄 부스러기를 깔아 놓듯이 까맣게 색깔이 변한 보도블럭을 따라 걸어간다. 중동사람들에게 연탄이란 양식과 같았다. 그 양식을 위해 엄니와 누이들, 그리고 묵묵히 일생을 걸었던 아버지의 한숨은 얼마만한 크기였을까. 삐죽이 솟아나온 옛집들이 아련한 기억을 끄집어 내준다.

골목을 씽씽 돌아 나오는 매서운 바람도 따듯한 아랫목을 쩔쩔 끓게 만들었던 연탄불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었다. 손가락 호호 불며 아랫목에 깔린 이불을 들추고 손을 넣으면 펄펄 끓는 온기가 금방 전해졌다. 그런 따뜻한 아랫목을 생각하면서 겨울의 문턱을 넘었다.

식구가 많았던 중동 사람들 대부분 연탄과 함께 겨울 하루가 열리고 연탄으로 밤을 이겨 냈다. 그런 연탄이기에 안도현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단 한번이라도 따뜻한 가슴이었더냐라고 선문답을 던지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중동탕 건물을 옆으로 지나간다. 이 근처가 병규네 집이었을 것이다. 그 옆 골목으로 가면 상근이네였고, 하필 찢어지게 가난했던 상근네 연탄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탄불 위에 양은 냄비를 올려 밥이 되면 그 구수함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상근이네 집에서는 그 아궁이에 솥을 걸면 그대로 부엌이 되었고, 석쇠를 걸고 고등어 한 마리라도 구울 때면 재래식 오븐이 되었다. 양동이에 물을 올리면 세숫물이 되고, 빨래를 삶으면 하얀색 윤기가 나는 그야말로 최신식 표백제가 되어주었다.

그런 고마운 연탄이었지만 관리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가스 중독사로 뉴스 시간을 종종 장식하곤 했던 게 또 다른 연탄이 얼굴이었다. 그런 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어느 집은 연통(굴뚝)을 높이 달기도 했다.

그런데 굴뚝이 높아지면 화력은 세지지만, 연탄이 쉽게 타버린다. 어렵게 사는 형편이 대부분인 연탄 때는 집들이 이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중동의 어머니들은 연탄을 아껴 때기 위하여 항상 잠이 부족했고, 그 결과는 늘 부옇게 뜬 얼굴로 나타났다.

 

연탄을 오랜 시간동안 아껴서 때려고 뚜껑을 덥고 숨구멍을 꼭꼭 막기도 했다.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하여 어머니는 밤 새 몇 번이나 일어나 아궁이를 들여다보곤 했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연탄 때문에 겨울 한 철 동안은 반쪽으로 야위어 갔다. 집안일을 모두 다 하면서 밖에 나가 행상을 하셨던 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진우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