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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 흑백TV, 파월 전우만큼 반가웠다" 군산 근대소리박물관 이종간 관장을 만나다
글 : 조종안 /
2017.06.01 13:36: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진공관 흑백TV, 파월 전우만큼 반가웠다"

군산 근대소리박물관 이종간 관장을 만나다

 

 

 


 

 

 

군산시 개정면 운회리(송호마을)에 자리한 근대소리박물관(관장 이종관)을 찾았다. 허름한 목조건물이 객을 반긴다. 이 건물은 6~7년 전까지 방아를 찧고 정미도 하던 송호리 방앗간(정미소)이다. 손때 묻은 쟁기를 비롯해 탈곡기, 풍구, 무자위(수차), 발동기, 홀태, 작두, 새끼틀, 갈퀴, 쇠스랑 등 다양한 농기구가 황토 냄새 그윽한 농촌풍경을 연출한다. 이종간(69) 관장은 일제강점기 정미소 기계도 보관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송호리 방앗간 처음 주인은 편산치태랑(片山久太郞)이라는 일본인 농장주였죠. 마을 사람들도 그의 성씨를 따라 편산이 방앗간이라고 했어요. 원래 정미소는 여기에서 200m쯤 떨어진 저쪽에 있었는데, 저희 집안 할아버지가 1951년 이곳으로 옮겨 재건축했고, 집안 어른들이 운영하다가 2014년 제가 인수했죠. 정미소 상량목을 비롯해 벨트를 걸 때 사용하던 나무사다리, 나락이나 쌀을 탱크에 올려주는 나무베어링이 부착된 승강기 등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문서(1936)에 따르면 편산(片山)은 경술국치 이듬해(1911) 조선으로 건너와 이곳(개정면 운회리)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개정면 협의원, 옥구군농회 상의원, 소작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지방농촌 진흥을 위해 공헌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농민 착취를 그만큼 많이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당시 편산 농장은 소작인 150명에 쌀 생산량은 한해 1500석이었다고 합니다. 정미소 나락 창고(100)는 제가 40년 전부터 수집해온 음향기기 보관창고로 사용하고 있지요.”

 

신형 비디오보다 구닥다리 소리통에 더 애착 느껴

이 관장을 따라 나락 창고로 이동했다. 발을 들여놓은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창고를 가득 메운 정체불명의 물건들. 이 관장은 모아도 모아도 또 모으고 싶고, 가져도 가져도 또 갖고 싶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100년도 더 됐을 나무상자(축음기)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놀랍다. 그래서 그런지 볼수록, 들을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21세기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도 구닥다리 축음기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인류에게 소리의 혁명을 가져다준 에디슨 실린더형 축음기를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 시험방송을 했던 라디오와 같은 모델인 1925년형 진공관 라디오, 원통형 실린더에 태엽이 부착된 전축, 원반형 밸리너 축음기, 1960년대 LP 플레이어, 카세트 오디오 및 레코더, 녹음기 등 세월의 나이가 느껴지는 각종 음향기기가 가득하다. ‘찌지~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유성기판이 100년 전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본업이 전기 기사인 이 관장이 지금까지 수집한 음향기기는 900여 점. 나락 창고로는 부족해 사무실까지 전시실로 사용한단다. 일제강점기 빅터 레코드에서 녹음한 춘향전 SP 음반(, 하권 20)도 보인다. 에디슨 축음기는 희귀품으로 지금도 소리 재생이 가능하단다. 이 관장은 집에 최신형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있지만, 낡고 잡음이 많은 구닥다리 소리통에 더욱 애착이 느껴진다며 활짝 웃는다.

 

니퍼 독’(nipper dog) 이야기

 

축음기(유성기)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강아지 한 마리가 혼(horn) 앞에 머리를 기울이고 앉아 있는 그림이다. 특히 60대 이상 장년층이 어렸을 때 봤음직 한 그래서 더욱 정겹게 느껴질 강아지 그림은 세계 음반 산업의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형성했다. 20세기 음반 산업 브랜드 10위 안에 들기도 했던 상표의 연원은 잔잔한 감동과 애잔한 스토리가 담긴 니퍼 독’(nipper dog)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영국의 어느 노인이 강아지(니퍼)를 키우면서 축음기로 음악(<무도회의 권유>)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 노인은 죽고 니퍼 홀로 지냈다. 그 후 축음기에서 주인이 즐겨듣던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귀를 기울이며 혼을 들여다보는 니퍼 모습을 프란시스 바로우라는 화가가 유화로 그려 상표로 만들었던 것. 가공의 이야기로 영국의 H·M·V 사가 1899년 에디슨 축음기 판매에 앞서 홍보용으로 만든 것인데 성공을 거두자 미국측 회사가 상표를 빌려 세계 축음기 시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고 전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죠. 니퍼는 1884년에 태어나 1895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실제 주인 목소리인 줄 알고 소리 나는 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앉아있는 니퍼 모습은 볼수록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화가 바로우가 처음 그렸을 때는 홀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에디슨 벨 컴퍼니(축음기 회사)도 개가 무슨 음악 감상을 하겠느냐며 로고 사용 제의를 거절했다고 해요. 그러나 영국의 EMI가 상표로 내놓고 급속도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서 명작이 됐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 빅터(Victor)와 기술협력을 하게 되죠.”

 

이 관장은 <일본으로 간 아리랑> SP 음반 두 장도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아리랑으로 언급되는 <일본으로 간 아리랑> 음반(78회전)도 두 장 소장하고 있지요. 첫 번째 음반은 1930년대 후반 일본에서 제작(Teichiku)된 건데요. 당시 일본 유명가수인 스가와라 츠즈코(菅原都)가 불렀습니다. 유행가(流行歌)로 표기해놓았기에 직접 들어보니 일본전통 가요(엥카)처럼 느껴졌어요. 광부나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이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거로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중학교 때부터 전자 기계 분야에 관심 가져

부모 따라 장터 구경을 나온 아이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쌀 됫박처럼 생긴 나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TV는커녕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50~60년대 시골집 대청마루 기둥에 매달려있던 유선방송 스피커다. 각종 스포츠 중계, 만담, 유명 가수들의 노래 향연 등으로 사춘기 청소년들을 상상의 세계로 인도했던 고마운 스피커. 언제 누구네 집에 있던 물건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보릿고개 시절, 저의 집에 설치돼있던 유선방송 스피커입니다. 청취료는 1년에 두 번. 6월에 보리 한 말, 11월에 벼 한 말씩 곡식으로 냈죠. 채널은 중앙방송국(KBS) 하나만 청취할 수 있었고요. 볼륨도 조절할 수 없었지만, 뉴스, 가요, 연속극 등을 듣는 우리 집 최고의 문화시설이었어요. 그때 제가 중학생이었는데 <김삿갓 북한 방랑기> <노래의 꽃다발> 등의 프로가 기억에 남고요, 한명숙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가 나올 때마다 콧노래로 따라 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개정면 운회리가 쌈터인 이 관장은 도시에서도 상류층이나 진공관 라디오를 보유할 수 있었던 1960년대 초, 농촌에서는 군() 통신용 삐삐선을 집집이 연결해 스피커를 설치했는데, 네모상자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마음에 뜯어봤더니 U자형 말굽자석 하나가 붙어 있었다내부를 확인한 순간 허망하면서도 신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전자·기계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고 부연한다.

 

농고에 입학해서는 라디오 통신강의록(6)을 받아 독학하면서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었다. 라디오 소리에 놀라고 기뻐한 사람은 이웃 어른들이었다. 그는 전축 조립에 도전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 라디오를 수리해주고 받은 사례금과 용돈을 모아 전축 조립에 성공한다. 음질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상무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는 외삼촌 소개로 전남 광주의 전파사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1970년 해병대에 입대해서도 통신병으로 병역의무를 마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소장품은 1967년산 흑백 TV

이 관장이 가장 아끼는 애장품은 취미예술품 경매 사이트(코베이)에서 구매한 동남 샤프 진공관 19인치 텔레비전’(1967년 동남전기공업에서 국내 두 번째 생산한 군납 면세품)이란다. 어느 날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발견했는데 생사(生死)를 함께 했던 전우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선뜻 사들였다 한다.

송충이 한 마리(이등병) 달고 월남전에 참전했죠. 전쟁수당은 월 80달러. 그중 50달러는 당시 정부가 고속도로 놓는다고 빼앗아가고 30달러가 제 몫이었습니다. 그나마 10달러는 의무적으로 은행에 저축했고, 10달러는 부모님 용돈으로 송금하고 나머지 10덜러가 진짜 내 몫이었죠. 월남에서 1년 동안 있었는데, 그 돈으로 어떻게 TV를 구입할 수 있겠습니까. 맨손으로 파월됐다가 맨손으로 귀국했죠.

 

가슴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지내던 어느 날. 인터넷 쇼핑을 하는데 진공관 TV인 것을 알리느라 뒤 커버를 열고 찍은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거기에 파월군납 면세용 TV 수상기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겁니다. 인증을 확인하면서 밥을 굶어도 이것은 꼭 사야겠구나!’ 하고 이튿날 냅다 쫓아갔죠. 꿩 대신 닭이라고 할까, 아무튼 파월군납··’ 문구를 보는 순간 죽었던 전우가 살아온 것만큼이나 반갑고 기뻤으니까요.”

 

역사의 향기가 깃든 음향기기를 손에 넣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종간 관장. 취미로 한두 점씩 구매하다 나중엔 옛것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소명 의식으로 좋아하는 막걸리를 참아가면서 모았다고 한다. 그는 미래 소망을 묻자 지금은 제대로 된 전시관이 아니다. 널따란 전시장을 만들어 이 시대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어떻게 영위했는지 후세에게 보여주는 게 꿈이라고 했다. 1백여 년의 소리 역사를 지켜온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박물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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