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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전한 진정한 孝의 울림” 후손 노용주에게서 들어보는 풍천노씨 3대조 노기현의 효행기 1-2
글 : 오성렬 /
2017.05.01 10:12:2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후대에 전한 진정한 孝의 울림” 

후손 노용주에게서 들어보는  

풍천노씨 3대조 노기현의 효행기 1-2






 

5. 진주 관찰사 조시영이 장례원(掌禮院)에 천거하여 올리는 글1

본도(경상남도) 관하 각 군의 선비들이 이름을 서로 연달아 낸 소장을 접하여 승인하온 즉

내용을 열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편안하게 다스림의 명을 받들어 정숙으로써 선을 권장하는 정사를 최고로 칭하고 효를 천거함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비에게는 높은 행실이 있어야하니 살아서는 봉사를 펴는 것을 칭찬하여 장려하여야 하며 죽어서는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표하여 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어야 바람 소리가 나듯이 해마다 역사의 글에 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루 다 손꼽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아 천거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보면 조정에 또한 이유 없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략)

 

앞과 뒤 모두를 자세히 살펴보니 읍의 선비들이 칭찬하는 글들과 벗들이 지어준 시문들이 읍에 줄지어 있어 통하는 문장들이 많아 수레의 굴대가 넘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기현은 이것들마저도 버리고 그의 형도 다 취하지 못하게 되어 그것들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독실함이 오직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는 것 또한 이보다 더 가상함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지켜 함께 한 바이니 相率齊를 세상에 널리 알게 큰소리로 외치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노기현의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뛰어난 효성은 특별하오니 세상 사람들에게 열어 주어 어리석음을 깨달아 통달하게 하고 집에 벼슬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쓰는(敍用)글을 써서 표하게 하여 이로써 세상의 나쁜 풍속이 좋은 풍속으로 교화되어 세상에 가르침을 권할까 합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이유에서 이것을 조사하시어 실행하심에 구차함이 없어 승인하시오면 어찌 샘물과 짐승의 감응이 있는 것에만 선비들이 의논을 가지런히 펴겠습니까. 그것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樹欲靜而風不止)’처럼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子欲養 而親不待)’라는 풍속을 권장하는 도리에 이와 같은 특이한 행실은 가히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는 아니 됩니다. 이에 보고하오니 이러한 사정들을 밝히어 아시옵소서. 특별히 들은 것들을 아뢰오니 칭찬하여 드날리는 곡들을 만들어 계몽하게 하심을 바라옵니다. 본 도 관하 각 군의 유생들이 이름을 연하여 호소한 글을 살펴봄에 그 미풍양속을 높이 세워 선행이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하여 보고하오니 밝게 살피어 특별히 임금께 아뢰어 포상하고 나타내어 법의 은혜를 입게 하기를 바랍니다. ‘光武 3(1899) 十月五日 경상남도 관찰사 조시영

掌禮院卿 趙秉弼 閤下

 

6. 장례원에 천거하여 올리는 글2

아뢰는 사람 : 진주 관찰사 이재현

본 도의 관하 각 군 유생들이 이름을 연하여 호소한 글을 살펴봄에 진실로 효행이 없으면 어찌 샘이 솟고 짐승이 감응하고, 유생들의 의론이 함께 할 수 있으리오. 그 미풍양속을 높이 세워 선행이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하여 보고하오니 밝게 살피어 특별이 임금께 아뢰어 포상하고 나타내어 법의 은혜를 입게 하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19028(공이 돌아가신 뒤)’

 

7. 노효자 효행록 후기

나 어릴 때부터 이미 함양에 노기현이 하늘이 낸 효자라 함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능히 몸을 박하게 하며 욕심을 절제하고 그 어버이에게 효를 행함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요, 거짓이 아니니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누우셔도 능히 솜옷을 못 입으면 반드시 스스로 누워 문을 가리어 바람을 막고 먹는 것을 배불리 못하면 스스로 그 밥을 수저질하여 먹여드렸다. 아버지께서 근심하는 빛이 있으면 반드시 수염을 만지고 놀며 웃어 기쁘게 해드리고 밖에서 저물게 돌아오거든 마을 밖에서 기다려 맞이하여 절하고 발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였다. 맛있는 음식 한 가지와 좋은 과일 한 개라도 얻으면 가슴에 품어서 바치고 일찍이 한 번도 방자하게 자기 입에 넣지 않으니 이웃 마을이 감탄하고 칭찬하여 그 자식을 훈계할 때에는 반드시 말하기를 노씨 집안의 아이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였다. (중략) 이 효자에게 무엇을 더하리오. 미풍양속을 세우고 삼강오륜을 떨쳐 세상의 가르침을 일으킴은 나라를 다스림에

먼저 힘쓸 것이거늘 어찌 관리들은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아니하는가. 나는 들으니 근래에 무릇 정표하고 포상함에 반드시 예의 조목으로 증명하되 비용을 대지 않은 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니 슬프다.

 

정사는 뇌물로써 이루어지고 은혜는 재물로써 값이 매겨지며 선은 가난함으로써 없어지니 세상의 도를 알겠도다. 나와 효자가 늦게야 태백 산중에서 서로 알게 되니, 대개 나와 나이가 같았으나 나는 그를 경외하여 감히 함께 대적하지 못했더니 서로 안 지 얼마 안 되어 효자는 이미 세상을 하직하였도다. 효자의 자식 영석이 여러 사람이 지은 장과 전과 찬과 술을 모아 엮어서 실록을 만들어 장차 이로써 그 전함을 무궁하게 하고자 할 적에 나의 말 한마디를 그 끝에 붙이기를 청하니 내 어찌 사양하리오. 나는 오히려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먼저 힘 쓸 바를 알기를 바람이 없지 않도다. 옛적에 치우가 난리를 일으키고 사이가 세상을 어지럽히자 황제가 크게 칠 때에 죽여 멸하게 함을 말하지 아니한 곳은 유독 기주의 서쪽 나라니 그 풍속이 부모를 잘 봉양함으로 군사를 거두어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 그 이름을 주어 말하기를 효양지국이라 하니 순임금과 우임금에 이르러서도 다 빈례로 대접하니 효를 능히 나라에서 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기유년(1909)맹동에 포산 곽종석이 삼가 기록하다.(곽종석은 효자의 아들 영석의 지인으로 추정)

 

8. 가장(家狀)

부군(府君)의 휘()기현이요, 두 번째 휘는 주현이며 자는 계옥이요, 별자호는 오천이다. 선조는 황해도 풍천부 사람으로 국자 신사인 휘 로 족보에 올리는 시조를 삼고, 중세에 영남 창원부로 이사하며 예조참판 휘 숙동공이 종빙에 거처하고 또 함양으로 이사하니 자손이 드디어 세세로 함양 사람이 되었다. 참판공이 휘 을 낳으니, 노분은 예문관 교리로 이조참판을 지냈다. 교리공 노분께서 휘 우명을 낳으니 노우명은 현릉참봉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참봉공 노우명이 휘 를 낳으니 노희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진사공이 휘 사준을 낳으니 노사준은 천관 참봉이 되었다. 이렇게 함양의 풍천 노씨가 대대로 학문과 의를 행하게 되자 고을과 나라의 추천을 자주 받으며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이니 노율은 성명(性命)의 학문에 깊어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치고 자호를 모고제라고 하였다. 조부의 휘는 건수이고 모친은 정선 전씨인데 휘 치경의 따님이다. 헌종 병오년 (1846)팔월 십일 진시에 부군(府君)이 개평리 옛집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겨우 말을 배웠음에도 응()하고 대답함과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새벽에 안부를 살피는 예절이 배워서 길들여진 것과 같이 하였다.

 

마을 글방에 나가 글을 읽음에 능히 각고를 풀지 아니하며 밤이면 반드시 동배(同輩)가 다 잠든 연후에 비로소 잠자리에 들고 조석에는 반드시 동배가 식사를 마치고 모이기를 기다린 연후에 들어가 먹었다. 이런 까닭으로 매번 부군이 오면 집에서 이미 음식을 치웠거든 부군이 반드시 밥을 받들고 어머니께 말하기를 식구가 많았을 것인데 어머니께서는 굶지 않으셨습니까, 소자가 어머니와 함께 이 밥을 먹고 싶습니다라고 하여도 어머니가 먹지 아니하거든 부군이 차마 혼자 먹지 못하고 밥상을 대하여 간절하게 권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어머니가 감동하여 같이 먹었다. 형제간에는 우애와 공경을 다하고, 일가친척과는 돈후함과 화목함을 다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히 거슬린 행실로 부군에게 들리지 못하고, 만일 부끄러운 소리가 효자에게 들리면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까닭으로 서로 고하고 경계하여 마침내 다 감화되었다. 어머니께서 본래 병이 많음에 부군이 모셔 약을 달여 드리고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임술년(1862)겨울에 마침내 돌아가시니 부군이 부르짖어 울며 기절하여 겨우 깨어나고, 초빈 후에도 시신 곁에 있어 곡소리를 끊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가 달래고 또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 어머니는 이미 죽었으니 너는 마땅히 나를 모시고 서로 의지해야 하거늘, 이에 도리어 오래 시신 곁에 있으면서 죽은 어머니만 생각하고 산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하였다. 부군이 곡하여 답하기를 아버지는 근력이 아직 강녕하고 또 두 분 형님이 곁에 있으니 어머니 빈소는 소자가 곁에 모시는 것이 정리로서 진실로 그러하니 걱정하지 마소서라고 말하였다. 아버지 또한 억지로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부군이 무덤에 거처를 정하고 돌아오지 않으매 아버지가 울며 말하기를 네 나이 스물 이 못 되었거늘 어찌 능히 여묘(廬墓)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 이제 장성한데 어찌 상()을 견디지 못함을 근심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아버지가 감동하여 초막을 지어주니 부군이 날마다 죽과 소금만 먹고 슬피 울기를 입에서 끊이지 아니하며 상복과 수질을 몸에서 버리지 않았다. (중략) 3년을 마치고 돌아와 나이 드신 아버지를 봉양함에 평일보다 잘했으나 1년 만에 아버지가 병을 만났거늘 모셔서 약을 달여 드리고 눈을 부치지 않은 것이 여러 달이었다. 아버지의 변을 맛보아 병의 정도를 증험하고 하늘에 대고 자기가 대신하기를 빌었으며 병이 심해지면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렸으나 마침내 초상을 당하니 한 잔의 물도 입에 들이지 않아 수척하여 뼈만 남았다. 장사 지냄에 어머니와 쌍분(雙墳)하여 부군이 다시 무덤가에서 여묘살이를 하니 마른 샘이 다시 솟아나고 가버린 호랑이가 다시 와서 어머니 거상할 때와 한결같게 하였으나, 부군이 슬피 사모하고 피눈물 흘리는 것은 어머니 상에 비해 더욱 애절하니 와서 조문하는 이들이 모두 효자가 건강을 상할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삼년을 잘 마치어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않게 하니 또 이로써 천지신명이 부지한 바가 있음을 알겠도다. 군수가 아전을 보내어 위로하고 쌀과 고기로 효자가 조석의 예를 올리는 것을 돕게 하였다. (중략)

 

그러나 고을과 마을의 포상을 밝히는 글이 수십 번에 이르렀으나 미풍양속을 세우고 집을 정표하는 법은 거행함을 얻지 못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로다. 슬프다. 부군이 오십 칠세인 임인년(1902)이월 이 십 구일 술시에 돌아기시니 이날 비 내림이 물 댄 것 같고 번개가 크게 쳐 철인이 죽음에 하늘이 슬퍼하였다. 오호 통재라, 부군께서 단양 우씨 아호제 휘 기주의 딸에게 장가드니 아호공은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 이름이 당세에 나타난 사람이라, 깊이 부군의 효에 감복하여 불러 사위를 삼고, 또 일찍이 허성제와 기노사와 모든 노숙한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강론하여 질문하고 나아가 질정하고 덕을 이뤄, 만년에 이르러 외영에 뜻을 끊고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쳐 이룬 자가 많았다. 부군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불초 영석이다. 영석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아직 어린지라 엎드려 생각건대 불초가 슬하에 처하여 오랫동안 교훈을 황추하여 마침내 들림이 없게 하고 또 부군이 돌아가신지 이십여 년 사이에 산하 인심이 다시 옛날 같지 않고 조사와 성덕한 이의 지식은 시들어가 자못 다한즉 부군의 신을 감동시키고 하늘에 통한 효가 쫓아서 멸할까 크게 두려워 삼가 여러 서류를 뽑아 기록하니, 후일에 말을 전할 자가 채택하여 은혜를 드리울 때를 기다리노니 엎드려 바라건대 당세의 군자는 애련이 여겨 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계해년(1923)시월에 불초 영석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이 글을 쓴다.

 

의 가풍은 현재 진행형

위 효행록을 남긴 영석은 효자 기현의 외아들로서 선친의 효행을 후대에 전하고자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손이 귀해 영석 역시 아들(원식) 하나만을 낳았는데, 이 분이 노용주의 선친으로서 이 대에 이르러 비로소 전례 없이 51녀의 자식을 둔다. 노용주는 위로 3명의 형(환신, 환창, 환태), 아래로 동생(환래)하나까지 동기간 모두가 남다른 우애를 보이며 다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를 조상의 음덕이라 여겨 조상을 모시고 기림에 있어 자손들 하나같이 모범을 선행하고 있다. 자손들은 지난 2009년도, 함양에서 효자 증조부 내외분과 조부 내외분, 그리고 부모까지 임피 가족묘원으로 이장했다. 길가 양지바른 남향의 산자락에 조성한 가족묘원은 앞에 저수지를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3대의 선영을 함께 모심으로써 자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시로 산소를 찾아 수목을 매만지고 풀을 뽑는 등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함양에 있을 당시 묘역에 있던 다섯 그루의 소나무 중 한 그루가 이유 없이 메마르고 시들었으나 임피 가족 묘역으로 옮겨 심은 뒤 다시 생기를 되찾아 푸르러지는 것을 보면서 비록 나무지만 조상의 혼령이 감응하는 것 같아 신기롭다는 말도 들려준다. 자손들은 해마다 함양에서 직계 10대조까지의 묘사(墓祀)를 지내느라 다 같이 다녀오기도 하며, 지난 2015년도 11월에는 노용주가 활동하는 군산역사사랑회 회원 24명과 가족 14명이 버스를 대절, 함양 탐방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집안의 화목(和睦)본부장 셋째 며느리

여섯 남매의 자손들이 집안의 경조사나 여행 등 대소사를 치를 때 전적으로 믿고 맡기는 며느리가 있다. 바로 노용주의 형수로서 바로 위 형(환태)의 부인인 천승희(千承姬). 이 셋째 며느리는 열성적 책임감으로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할 뿐만 아니라 동기간의 단합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 집안 전체의 추대로 화목본부장이라는 별난 직을 만들어 임명했다. 그녀는 인문학적 소양도 깊어 약 4년 전에는 증조부의 효행 관련, 지방의 유림들이 관찰사에게 아뢴 글, 관찰사가 조정의 장례원에 정려를 추천한 문서 등의 원본을 들고 ‘KBS진품명품에 출연함으로써 감정위원으로부터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진품이라는 판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녀는 때로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다. “시집 간 딸은 이미 남의 집안 식구가 된 것이고 내게는 며느리들이 더 귀중하다며 남달리 아껴주셨기 때문이다. 말년에 치매로 잠깐 고생은 하셨지만 자식들과 며느리에 대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넘치셨기에 그리움이 더욱 깊은 지도 모른다.

 

급속한 산업화로 경제성장을 이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전통적 가족 개념과 효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판이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출산율 저하에다가 각자도생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홀로서기 사회다 보니 공동체적 관계보다는 자아실현의 개성 중시 세태로서 평균 수명이 짧아 효도를 할 기간 역시 짧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평균수명이 당시에 비해 20여 년 이상 길어진 고령화 사회로 일방적 효도만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세상으로 변했기 때문일 터다. 그러다보니 효도는 그만 두고 부모를 봉양하는 기본적인 도리조차 하지 않으려는 윤리 상실의 세태가 되어 사회문제와 함께 커다란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던가, 그럼에도 의 가풍 속에서 문중에 대한 각별한 자부심과 연대감으로 모든 가솔이 화목을 돈독히 하며 깊은 우애를 보이는 노용주 집안은 자손대대로 웃어른을 공경하고 조상을 섬기는 가풍을 전해 세상을 향해 도덕과 윤리를 새롭게 일으키는 귀감으로 남게 되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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