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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다고요?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일입니다
글 : 배지영 / okbjy@hanmail.net
2016.07.01 16:16:0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하찮다고요?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일입니다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5] 자동차 정비사 송현승

 

할아버지! 저 커서 어른 되면 자동차 사주세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1996년 어버이날, 초등학교 1학년인 현승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 전에 현승은 통 글자로 한글 공부를 했다. 현승의 특성을 잘 아는 어머니는 종이에 포텐샤’, ‘소나타’, ‘캐피탈같은 자동차 이름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놓았다. 자박자박 걷던 아기 현승이가 엄마”, “아빠다음으로 한 말은 유공(SK 주유소의 옛 이름)”이었으니까.

 

현승의 할아버지는 약사였다. 현승의 아버지도 약사. 그래서 현승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아들의 진로를 정해놓았다. 바로 약사. 장차 전문직이 되어야 할 아이는 집안의 가전제품을 수없이 분해·조립했다. 음악이 나올 때마다 움직이던 스피커는 궁금하다고 칼로 찢어서 안을 살펴봤다. 오디오는 분해하고 끝내 조립하지 못 했다.

 

저는 기계나 자동차에 진짜 관심이 많았어요. 엄마는 원어민 선생님을 불러다가 같이 놀면서 영어를 배우게 했고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요. 학원도 많이 다녔어요. 근데 고3 때 수학이 안 되니까 약사는 포기했죠. 더구나 저희 때는 수능등급제였어요. 수학 가형을 봐야 가산점이 있는데 저는 나형을 봤어요. 수능시험은 망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는 공부에 싹이 보이는 현승의 동생 하진을 데리고 군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거기서 꽃집을 했다. 그러니 현승의 대학 선택 기준은 오직 서울. 그는 차선책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방의 한 사립대 공대로 진학했다. 기대와는 다른 학과 공부, 재미없었다. 어머니는 현승에게 재수해서 교대라도 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지라고 했다.

1학년 여름방학. 현승씨는 차라리 놀다가 군대 갈까망설였다. 마침, 일산에서 자동차 튜닝 가게를 하던 사촌형이 의정부로 일터를 옮겼다. 동시에 그에게는 기적이 일어났다. 입시 공부만 권하던 어머니가 차 좋아하니까 방학 동안 형네 가게에서 일해 봐라고 제안했다. 현승씨는 분신술을 쓴 것처럼 재빠르게 사촌형 가게에 당도했다.

 

가자마자 너무 재밌는 거예요. 처음에는 엔진 내리는 걸 도와주는 보조였어요. 차에서 엔진을 빼서 더 좋은 부속으로 교환을 하는 거예요. 그걸 개조해서 더 빨리 나가게 하는 게 튜닝의 기초 작업이거든요. 엔진의 마력을 높여주는 작업을 한 거죠. 브레이크도 더 좋은 걸로 바꾸고요. 밤을 새우고 일을 해도, 차를 만지는 게 좋았어요.”

 

푹푹 찌는 카센터에서 뜨겁게 일한 여름이 지날 때, 어머니는 현승씨에게 자동차 정비 계속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러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휴학 하고 한 학기만 더 해라고 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서 끝까지 해 봐야 다른 일도 눈에 들어오는 거니까. 좋아하는 일을 말리면, 자식에게 듣게 되는 건 원망뿐이니까.

 

다른 사람들 차를 고칠수록, 현승씨는 자기 차가 갖고 싶었다. 사정사정해서 어머니가 타는 카니발을 팔고 오래된 스포츠 카 티뷰론을 샀다. 몇 번 출·퇴근 해보고는 차 부속품을 싹 다 뜯었다. 쾌거였다. 어깨 너머로 알던 차 구조를 많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현승씨에게 정말로 공부해서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따 봐라고 조언했다.

 

스무 살 겨울, 현승씨는 자신과 출생년도가 같은 1989년 식 차량으로 부품 교환, 바퀴 탈부착, 브레이크 수리 같은 과정을 배워서 정비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자격증을 땄다고 신기술이 솟아나지는 않았다. 현승씨가 잘 알지 못 하는 차량이 가게로 들어오면 긴장했다. 어떤 외제차를 점검할 때는 오일 빼는 구멍이 어디인지 몰라서 헤맸다.

 

제 선생님은 구글이었어요. (웃음) 엄마가 과외 많이 시켜준 덕분에 영어가 됐으니까요. 외국은 인터넷 동호회를 포럼이라고 하거든요. ‘BMW 포럼이나 벤츠 포럼에서 종류 별로 차를 배웠어요. 외국은 공임이 비싸잖아요. 자기네 차고에서 직접 고치는 과정을 포럼에 올려놔요. 그걸 배웠죠. 모르는 건 운영자나 글 올린 사람한테 메일을 보내서 물어봤고요.

 

미국은 튜닝 시장이 진짜 크거든요. 차 고치다가 없는 부품은 세트로 미국에서 시켰어요. 물건이 잘못 올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걔네한테 전화를 하죠. 어떤 게 빠졌다고요. 장비 장착 다 했는데 시동이 안 걸린 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MSN 메신저로 다 얘기 했어요. 외국은 기술직이라고 무시하는 게 없더라고요.”

 

2010, 할아버지는 현승씨에게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포르테 쿱을 사주었다. 그는 임시번호판이 달린 새 차를 분해했다. 머플러를 바꾸고, 마력을 높이고, 휠도 바꾸었다. 차 안에서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집에 자러 올라가면, 주차장을 향해서 계속 자동차 열쇠를 삑삑 눌러봤다. 남성미 있게 운전하는 그의 어머니는 차가 잘 나가서 좋다고 했다.

 

현승씨의 차는 포르테 쿱동호인들에게도 알려졌다. 구경하러, 또는 정비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는 인터넷 동호회 카페에 자동차의 정비, 엔진오일과 브레이크와 머플러 교환 과정을 찍어서 올렸다. 일이 많으니까 야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퇴근하고는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강릉도 옆 동네처럼 자주 다녀왔다.

 

열심히 정비하고, 재밌게 살다 보니까 작업 잘 한다는 소문이 났어요. 근데 제가 일 끝나면 되게 꼬질꼬질해요. 기름때는 잘 안 지워지잖아요. 어느 날 동호회 모임에 갔더니 한 누나가 너는 손도 안 씻고 다니냐고 해요. 정비사는, 남들이 하대하는 직업이라는 자각을 처음 했어요. 상처 받아서 일을 못 했어요. 두 달 지나니까 다시 차를 만지고 싶더라고요.”


 

현승씨의 친구들은 어느새 다 군대에 가 있었다. 그는 운전병으로 가고 싶었다. 문제는 팔. 고등학교 때 스쿼시를 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팔을 돌리면 툭툭 소리가 났다. 그런 팔로 몇 년간 정비를 하니까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픈 날도 있었다. 항상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 MRI를 찍고서야 나온 병명, 아탈구. 수술을 한 그는 공익 판정을 받았다.

 

그의 사촌형은 용인으로 가게를 옮겼다. 직원도 일곱 명으로 늘었다. 현승씨도 기술 가진 직원, 따로 받는 월급은 없었다. 부모님한테 손 벌리기 싫은 그는 6개월간 사무실 소파에서 잤다. 군산에서 올라온 아버지가 보고는 원룸을 얻어줬다. 현승씨가 2년간 산 곳은 에버랜드 앞에 있는 작은 방. 밤마다 축제의 불꽃이 터졌다. 그는 가끔씩 서러웠다.

 

제가 어릴 때 11년간 에버랜드 연간회원이었어요. 아빠랑 진짜 자주 왔거든요. 근데 코앞에 살면서도 못 갔어요. 힘들어도 사촌형 가게에서 버틴 건 기술 때문이었어요. 요즘 자동차에는 전자제어 장치가 있어요. 키를 돌림과 동시에 컴퓨터가 연료도 쏘아주고, 피스톤도 움직여서 시동이 걸리거든요. 액셀도 사람이 10% 정도 밟으면, 나머지는 컴퓨터가 해요.

 

근데 출고된 자동차는 설계된 성능70-80% 정도만 사용할 수 있게 나와요. 나머지를 채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새로 구성하고 데이터를 수정하는 작업을 맵핑이라고 해요. 지도를 그린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저는 맵핑 기술을 FM 대로 잘 배웠어요. 맵핑 일을 하니까 순정 그대로의 자동차가 좋아졌고요. 튜닝은 하기 싫더라고요.”

 

현승씨에게 다 배웠으니 하산 하거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선택했다. 스물여섯 살 여름부터 군산시청 새만금 국제협력과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다. 시원한 실내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한미친선협의회 사진 전시회도 하고, 외국손님도 맞았다. 행사 때마다 이름표를 만드니까 칼질할 때는 자세가 나왔다. 안 해본 일들이라서 다 재미있었다.

 

그는 항상 아버지랑 둘이서 점심을 먹었다. 현승씨의 어머니와 동생이 서울로 가고 나서 아버지는 주말 부부생활을 10년간 했다. 신장이 안 좋아서 하루에 네 번씩 투석하면서도 집안 살림을 건사하고, 오후에는 약국에서 일해 온 아버지. 현승씨와 사는 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부자는 아기자기한 소품을 사다가 집안을 꾸미고, 꽃을 가꾸었다.

 

사회복무 기간이 끝나면 서울로 갈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아빠만 두고 갈 수가 없더라고요. 군산은 지역사회라 금방 누구네 아들, 조카, 친구인지 알아요.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서울에는 없잖아요. 고민했죠. 대학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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