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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지난했던 그의 발자취
글 : 조종안 / jay0810@hanmail.net
2016.02.01 11:39:5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생짜기생 되기가 얼매나 어려웠는디,

그런디도 기생출신이라고 천시허고..”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지난했던 그의 발자취

 

전북 군산에는 권번(券番:일제강점기 기생조합) 출신 기생(妓生) 두 분이 생존해 있다. 국내 유일의 민살풀이(수건 없이 추는 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89)와 구음(口音) 구사가 뛰어났던 김난주(90) 할머니다. 두 할머니는 군산 소화권번 출신으로 70년지기 친구이자 예기(藝妓) 선후배 사이. 권번 밥그릇 수로 따지면 장금도가 7~8년 위다.

 

가시밭길처럼 험난했던 인생. 무지갯빛 환희에 젖던 시절도 있었다. 곱디고운 칠흑색 머릿결이 호호백발이 된 지금은 호젓한 언덕배기에 피었다가 시든 할미꽃처럼 외롭게 지내는 그들. 굽이굽이 인생행로가 비슷한 두 사람은 사흘이 멀다고 전화를 걸어 안부도 주고받고,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를 되뇌며 덧없는 세월을 노래하였다. 그랬던 그들이 최근에는 전화기 번호판조차 누르기 버거울 정도로 몸도 정신도 쇠해버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장금도는 춤추는 해어화(解語花), 마지막 예기, 명인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김난주는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이 전부라는 것. 김 할머니는 지난 2012112일 오마이뉴스 기사(“기생질 허고 싶어 시집서 두 번 도망쳤지”)를 통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오늘은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여남은 살 때부터 춤 연습장 기웃거려

 

장금도 명인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은 짜장면. 팔보채나 샥스핀 같은 고급요리보다 훨씬 맛있어서 좋단다. 그의 입맛을 따라 군산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몇 차례 만났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그는 기생시절 버릇(수줍음)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장금도(張錦桃)19281(호적 19299) 군산부 소화통 2정목(현 군산시 중앙초등학교 앞 골목동네)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본래 今桃였으나 훗날 아버지가 비단결처럼 곱고 아름답게 불로장생하라는 의미로 이제 비단 으로 개명했단다. 그는 춤꾼이 될 팔자를 타고났는지 여남 살 때부터 춤 연습장을 자주 기웃거렸다.

 

구경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춤 선생이 집에 가라고 해도 돌아섰다가 눈치를 살피며 다시보기를 되풀이했다. 배우고 싶어도 집이 가난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에게 열두 살 되는 해(1939) 기회가 찾아온다. 가무(歌舞)를 가르치는 군산 소화권번 월사금(학비)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 이웃에 사는 가야금 선생 김영주(퇴기)였다.

 

소화권번(4년제)에 입적한 그는 회초리를 맞아가며 예의범절과 단가를 배운다. 이기권, 김준섭, 민옥행 등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김백룡에게 검무, 화관무, 포구락 등을 익힌다. 최창윤에게 승무기러기춤일인자 도금선에게 살풀이춤부채춤을 전수받는다. 도금선은 당대의 예인이었다.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가 그의 기러기춤을 배우기 위해 1940년대 초 군산에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장금도는 권번 졸업을 앞둔 열다섯 나이에 군산극장에서 초연(初演)을 하게 된다. 그해 열린 수재민 돕기 예기 연주회에서 살풀이와 승무를 선보인 것. 이후 군산의 한량들 사이에 춤은 장금도다!’는 말이 회자되고 시내 요릿집(요정) 앞에는 장금도명패가 내걸리기 시작한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김제, 익산, 전주 등지 한량들 귀에까지 들어간다.

예기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경찰서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요릿집으로 놀음(밤 마실)을 나갈 수 있었던 시절. 시험은 명월관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일본어로 치렀다. 시험관은 권번장과 선생들. 군산 부윤(시장), 경찰서장, 지역 유지들도 참관했다. 영특했던 장금도는 소리와 춤 모두 수석으로 졸업, 가무가 가장 뛰어난 예기로 인정받는다.

 

일본군 위안부피하려고 열일곱 살에 결혼

 

장금도는 열여섯에 명월관, 동양관(근화각), 만수장, 동해루, 쌍성루 등으로 놀음을 나가기 시작한다. 검무도 추고 승무도 하고 소리도 잘했던 그는 돈도 제일 많이 벌었다. ‘수양 엄니’(김영주)에게 진 빚(권번 학비)도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 그렇게 잘 나갈 즈음 예기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일제의 처녀 공출’(일본군 위안부)이었다.

 

데이신따이(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면····. 그때 마침 중매가 들어와 열일곱에 부여로 시집을 가버렸지. 농사도 짓고 면사무소 댕기는(다니는) 열 살인가 더 먹은 남자였는디 부인이 있는 사람이더라니께. 애기(아기)는 들어서고 당초 못 살겠더라고.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밤마다 등잔불 앞에서 울고불고 하니께 시어머니가 친정에 가서 몸을 풀라면서 보내주드라고···.”

 

광복(1945)은 어린 예기에게 고달픈 살림만 떠안겼다. 이듬해 몸은 풀었지만, 시어머니는 돌봐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요정에 나갔다. 열아홉 되는 해에는 애기를 친정엄니에게 맡기고 상경한다. 서울 친구와 선배들 소개로 금정, 명월관 등으로 놀음을 나가던 그는 전쟁(1950)이 터지자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꼭 싸쥐고 군산으로 내려온다.

 

전쟁, 피난, 휴전 등 격랑의 시대에도 그의 명성은 빛을 더했다. 미제 깡통문화를 따라 들어온 카바레, 맥주홀, 여급(여종업원) 등이 군산 화류계를 강타하던 시절. 군산의 한량들은 맥주홀 여급의 2~3배 되는 비용()을 들이면서 장금도를 찾았다. 그들은 요정에 갔다가 어여쁜 여급들이 들어와 인사하면 이게 무슨 요정이냐, 술집이지라고 하며 예기들을 불렀다. 그중 가장 많이 호명된 이름이 장금도였던 것.

 

그때 손님들은 인심도 좋고 점잖은 어른들이었지. 그전에 영화를 보믄 굉장히 추하게 나오던디 잘못된 거여. 춤 잘 춘다고 등어리나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 가끔 손은 잡아주지. 막 비비고 흔드는 건 없었어. 영화처럼 그렇게 비벼대면 흰 모시옷을 어떻게 다 감당허게. 요새처럼 빨아 입는 옷도 아니고 손질 한 번 할라믄 얼매나 힘드는디···.”

 

손님들에게 사랑을 흠뻑 받았던 장금도는 스물아홉에 요정과 인연을 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 반 친구가 느 엄니가 우리 집에서 춤췄다고 놀려댔다며 펑펑 울더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엄니, 인자는 절대로 춤추러 댕기지 마!” 소리에 충격을 받아 놀음을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기생 출신 아닌척 허니라고 나를 숨김서 살았어. 얼굴이 알려지는 게 무서워 국악원에도 안 가고, 노인정에도 안 나갔지. 전주나 부안 잔칫집 초대나 서울로 공연 갈 때도 한복을 아들 몰래 세탁소에 맡겨 놨다가 입고 댕겼응게. 자식이라고는 그 아들(월남전 참전용사)이 전부인디 병(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고생 허다가 몇 년 전 나를 앞서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니께···.(한숨)”

 

극장 영사실 기사였던 큰오빠가 젖먹이 아들을 남겨놓고 병사(病死)하고 학도병에 나간 남동생이 전사하자 가족(조카 포함 10식구) 생계를 떠안았던 장금도, 그는 조카들 학비까지 대면서 방 네 개짜리 자 기와집도 장만한다. 춤을 극구 말렸던 철부지 아들이 환갑을 넘긴 초로가 되어 공연장에 찾아와 꽃다발을 건네줄 때는 환희의 눈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타고난 춤꾼인 그는 지금도 몸은 아프지만, 춤출 때가 젤 행복혀!”라고 말한다.

 

지방 한량들이 장금도 춤을 원했던 이유

 

살풀이춤이 치밀하게 새겨 넣은 청자라면 민살풀이춤은 무심한 맘으로 담담하게 꺼낸 백자였다. 잘 짜인 살풀이춤이 조각보의 화려함이라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채색하지 않은 결 고운 한 필 비단이었다. 장금도의 고립과 고독에는 송구하지만 춤에는 축복이었다. 단지 수건을 들지 않음이 아닌 한없이 흐르며 구사하는 즉흥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새롭게 다시 맞는 위대한 완성이다.” -진옥섭 저서 <노름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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