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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먹으러 오는 고추짬뽕, 비법을 알려 드립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11.01 11:22:2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유덕아, 너는 커서 뭐 헐래?”
“장관이요. 그거 되고 싶어요.”
“그러믄 역사책이랑 많이 읽어야겄다.”

아버지는 유덕에게 18권짜리 역사책 전집을 사 주었다. 열한 살 소년이 전집을 절반쯤 읽었을 때, 아버지는 쓰러졌다. 어머니는 “논 한 필지(1천평) 팔아서 간호하면 병을 다 고치겠지” 하며 논을 팔았다. 치료비는 계속 들었다. 논 여덟 필지를 팔고, 산을 다 팔아도 아버지 병은 차도가 없었다. 남은 건 집 한 채와 논 한 필지뿐이었다. 

몸져누운 아버지는 장남인 유덕에게 “학업을 계속해라”고 했다. 유덕도 그러고 싶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학교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기울어만 갔다. 혼자 농사지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유덕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마흔아홉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79년, 어머니와 9남매만 남았다.

“열아홉 살에 일을 시작했어요. 전주 공업사 옆에 조그마한 중화요리점 하나가 있었어요. 거기가 사촌형네 집이에요. 내가 일을 하니까, 형이 우리 집에 생활비를 보냈어요. 내 용돈도 좀 주고요. 형이 먼저 ‘수타’를 가르쳐줬어요. 내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좋으니까 면이 많이 나오겄다 싶어서요. 원래는 주방에서 허드렛일 하고, 양파부터 까야 하는디요.”

유덕씨는 오전 5시에 일어났다. 연탄불에 조리를 하던 시절이라서 불부터 피웠다. 수타면을 맛있게 만들려면 반죽을 잘 치대야 했다. 서른두 살인 사촌 형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유덕씨가 잘 못하면, 그 자리에서 때렸다. 일하기 싫었다. 그러나 공부 시켜야 할 동생들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는 오로지 중화요리점 주방에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칼질까지 배운 유덕씨는 짜장면 만드는 기초를 배웠다. 그때는 가게마다 춘장을 담그던 시절. 손님 그릇에 담아주고 남은 면은 삭혀서 콩가루와 소금, 캐러멜을 넣어서 항아리에 저장했다. 3개월쯤 지나면 춘장이 됐다. 한 번은 유덕씨가 춘장을 제대로 못 만들어서 맛도 이상하고, 곰팡이가 피었다. 사촌형한테 엄청나게 혼났다. 그 와중에도 유덕씨는 말했다. 

“형, 우리 이거 하지 말지? 춘장도 다 기계로 자동화 돼서 나와요. 짜장 맛은 전국이 똑같을 거 아니에요?”
“네 말이 맞다. 사서 쓰자.”   

 

일은 오후 11시에 끝났다. 가게에는 딸린 방이 없었다. 그는 식탁 위에 이불을 깔고 혼자서 잤다. 유덕씨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고, 군대에 갔다. 스물다섯 살이 된 유덕씨는 여전히 사촌형 가게에서 일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참고만 사는 유덕씨는 친구들 사는 모습이 부러웠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피했다.

“연탄 대신 석유 빠나(버너)에 음식을 하는 시대가 됐어요. 주유소에 기름 달라고 주문 전화를 걸으니까 받는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임실 사는 아가씨래요. 그 아가씨 꼬실라고, 만두도 자주 싸서 보냈어요. 한 번은 일 끝나고 주유소로 간다고 말했어요. 근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을 못 하겄는 거예요. 얼굴만 보고 집에 와서 누웠는디 딱 얼굴이 아른거려요. 그렇게 천사 같은 여자가 없어요.”

유덕씨는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9남매 중의 장남, 가진 돈은 없었다. 매력은 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기고,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놓치기 싫은 현희씨에게 “만납시다”고 전화를 걸었다. 둘이 처음 간 곳은 호프집. 유덕씨는 맥주를 마셔도 속이 탔다. 돈 한 푼도 없어서다. 그날 데이트 비용은 현희씨가 냈다.  
 


1987년, 유덕씨와 현희씨는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 부부가 되었다. 유덕씨 부부는 군산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창성동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아버지네 집에서. “그냥 살아라”고 해서 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덕씨는 중화요리 식당 ‘만춘향’에 취직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덟 명. 1주방장은 중국인, 2주방장이 유덕씨였다.

“전주에서 일 배울 때 사촌형이 그랬어요. ‘너는 장남이고 가난하니까, 빨리 배워서 창업해라’고요. 그런데 나는 군산 사람들 취향부터 알고 싶었어요. 군산 사람들은 전주 사람들보다 통 크게 먹어요. 입맛도 세고요. ‘만춘향’에서 2년 6개월 동안 일하면서 알았어요. 그 사이에 집사람은 큰애를 낳고 키웠어요. 내가 월급 32만 원을 받았는디 아끼고 잘 모았어요.”

규모가 큰 중화요리 식당에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주방에 격리된 채로 일한다는 뜻. 유덕씨는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과 접촉하고 싶었다. 조그만 식당으로 옮겨서 손님들에게 “오셨어요?” 말을 건넸다. 손님으로 만났는데 벗이 되는 기쁨도 알았다. 사람 관계를 배웠다. 그렇게 작은 중화요리점에서 주방장으로 8년간 일하고 나서야 독립했다.

IMF 때인 1998년, 사는 게 모두 힘들었다. 주저앉거나 도망친 사람들도 많았다. 유덕씨는 상권이 저물고 있는 구도심에 ‘흑룡각’을 열었다. 셋째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현희씨는 가게로 출근해서 남편 일을 도왔다. 장사가 안 돼서 시름이 많은, 상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였다. 

“술 먹고 나면 제일 좋은 게 얼큰한 짬뽕이에요.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그래서 고추짬뽕을 만들었어요. 그때까지 군산에는 확실히 없던 음식이에요. 고추만 넣으면 속 쓰리고 배가 아프잖아요. 이것저것 넣어봐야 할 것 아니에요? 죽순, 표고, 양송이버섯, 매실 액기스를 넣어서 만들었어요. 속을 안 배리고(버리고), 개운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2001년, 유덕씨는 지금의 자리인 군산시 미원동으로 이전했다. 월세 30만 원, 건물주가 선한 사람이어서 유덕씨 부부의 마음은 편했다. 가게 이름은 ‘지린성’. 중화요리점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지었다. 아내 현희씨가 좋은 이름이라고 칭찬했다. 가게는 군산 시민들이 알아주는 음식점으로 커 나갔다. 유덕씨는 고추짬뽕처럼 잘 나가는 고추짜장면을 만들었다.

주방장 일은 힘들다. 오전 6시에 출근해서 신선한 고기와 채소를 받아서 준비한다. 재료를 손질하는 칼도 무겁고, 조리하는 프라이팬도 무겁다. 어깨, 다리, 허리에 골병이 든다. “식당 주인들이 원래 영양실조 잘 걸려요” 라고 말하는 유덕씨는 점심을 안 먹는 게 습관이 됐다. 바쁘니까 못 먹다가 안 먹는 게 편해졌다고 한다.

 

“옛날에 수타면을 많이 해서 어깨가 안 좋았어요. 양쪽 어깨를 다 수술해야 하는데 걱정이더라고요. 가게를 쉬어야 하잖아요. 2011년에 왼쪽 어깨부터 수술했어요. 그러믄 6개월은 일을 못 해요. 팔을 못 쓰니까요. 재활운동을 엄청나게 열심히 했어요. 손님들이 기다리니까 빨리 일하고 싶어서요. 들어가는 돈도 많고요. 가게는 쉬어도 월세는 계속 내야잖아요. 

3개월 만에 문을 열었죠. 그 전에 가게 앞에다가 언제 문 연다고 붙여놓기만 했거든요. 첫날에는 손님이 별로 안 올 줄 알았어요. 재료도 일부러 조금씩만 준비했고요. 근디 내 생각이 완전히 빗나가 버린 거예요.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라고요. 점심만 하고 끝났어요. 재료도 떨어지고, 내 몸도 안 풀어진 상태에서 하니까 통증도 심해서요.” 

몇 년 전부터 ‘지린성’의 고추짬뽕, 고추짜장면은 외지 사람들도 찾아와서 먹는 음식이 됐다. 도축해서 바로 오는 생고기로만 만드는 탕수육도 인기 메뉴다. 부부 둘이서만 꾸려온 테이블 8개짜리 가게는 일손이 달렸다. 지금은 유덕씨 일을 돕는 주방보조도 한 명 있다. 주문 받는 사람 네 명, 설거지를 전담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오전 9시 반부터 손님들이 찾아온다. 평일 저녁에는 오후 7시까지만 주문을 받는다. 주말에는 대기번호를 250번까지 발행할 정도로 붐빈다. “멀리서 왔으니까 먹고 가게 해 주세요” 라고 사정해도, 주말에는 오후 5시 반까지만 번호표를 준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 손님들이 식사하고 나가면 오후 8시, 뒷정리 하고 퇴근하는 시간이 오후 11시다.

나는 <매거진군산> 진정석 편집장을 통해서 ‘지린성’을 알았다. 고추짜장의 유명세도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알았다. 모르면 무모한 법. 하루 중 언제라도, 도유덕씨의 자투리 시간에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가씨(이 낯선 호칭에서 나는 빵 터졌음)가 내 대신 일해 준다믄 언제라도 인터뷰 할 수 있어요. 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요”라며 웃었다.   
  
‘지린성’은 매주 화요일에 가게 문을 닫는다. 9년 전부터 도유덕씨는 쉬는 날에도 짜장면을 만들었다. 그걸 챙겨 들고서 군산 발산에 있는 고아원에 갔다. 너무 가난했고, 너무 고생했던 지난날. 그때가 떠오르는 게 싫어서 청년 시절의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린 유덕씨. 힘든 일을 많이 겪고 살아서 그냥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고.  

“처음에는 집사람이 휴일에는 쉬라고 했어요. 돈도 많이 들어가고요. 지금은 좋은 일이라고 안 말려요. 댕기던 고아원은 없어졌어요. ‘구세군 목양원’은 2006년부터 계속 가요. 한 달에 한 번씩 짜장면 100인분을 만들어서 가요. 3개월에 한 번은 짜장면하고 탕수육을 같이 만들고요. 매달 해 줄 수가 없어요. 혼자서 100인분을 할라면 아무래도 힘들잖아요.”


유덕씨의 귀에는 이침이 촘촘하게 꽂혀 있었다. “얼굴 이뻐질라고 했어요”라면서 웃었다. 사실은 온 몸의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침이란다. 올해 나이 쉰세 살, 사랑이 많은 아내를 만나서 아이 셋을 낳아 잘 키웠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34년간 중화요리점 주방에서 보낸 게 그의 인생이다. 사람들이 일품이라고 찾아오는 메뉴도 개발했다.   

“군산에는 우리 집보다 더 유명한 ‘복성루’가 있잖아요. 그 분은 진짜 대단하시죠. 나이가 72세예요. 최고령 주방장이죠. 몸이 안 아픈 디가 없을 거예요. 내가 이 음식점을 언제까지 할지는 몰라요. 나이 들어서까지 한다면, 아마 ‘복성루’처럼 점심 식사까지만 할 수도 있겠죠. 그치만 음식점 하는 한은 봉사를 해야지. 끝까지 해야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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