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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위한 김대중 대통령> 사진전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11.01 10:20:3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을 지낸 후광 김대중(1924~2009), 그의 생애 사진전(11월 5일~12월 5일)이 군산시 장미동 ‘W 갤러리’에서 열린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온 김대중은 2009년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 특별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듣고 내 몸이 반쪽으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우리가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는 말을 남겼다.

 

<대중을 위한 김대중 대통령>이란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교복 차림의 10대 소년에서 대통령 퇴임 후 생을 마감하는 해까지 김대중의 일생이 담긴 사진 120점이 선보인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 유세를 듣기 위해 청중이 구름처럼 운집한 군산 월명종합경기장을 비롯해 중앙로에 내걸린 김대중 사면복권 환영 현수막(1987), 군산시 시의원들과 변산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1990년대 중반), 구 역전광장(1995) 등 군산 관련 사진도 20여점 전시되어 관심을 끈다.

김대중(아래 DJ)은 전남 하의도 외딴 섬에서 태어나 <목포일보> 사장이 된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 10년여의 해외망명 및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였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한국 정치역사상 최초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듬해 2월 대통령에 취임한 DJ는 ‘금 모으기’를 통해 외환위기(IMF)를 앞당겨 극복한다. 여성 지위향상과 한류열풍, 그리고 한국을 세계가 부러워하는 IT 강국으로 만든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냈다. 아시아와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공로와 남북 평화(남북정상회담, 남북공동선언 등)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퇴임 후에도 국민의 저력과 양심을 믿었던 그는 2009년 8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도전과 좌절,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DJ의 일생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사진전은 ‘사단법인 행동하는 양심’(이사장 이해동 목사) 군산지회(지회장 신문식)가 주최하고 군산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매거진군산>(대표 이진우)이 주관한다. 지난 월요일 법률 상담자들 만나랴, 행사 준비하랴 정신없이 바쁘다는 신문식 지회장(현직 변호사)을 만났다.

건강한 사회 만드는 작은 밀알이 되고 싶어

 

신문식(69) 변호사는 군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농가의 막내아들(3남 3녀)로 태어나 유년기에 부친을 여의고 엄격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다. 학창시절 희망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유능한 법관이 되는 것. 그가 태어난 회현면은 전형적인 농촌임에도 강용구 변호사를 비롯해 김동주, 김귀동, 문철기, 신영한, 김관영·형완 형제 등 사시 합격자가 10명 넘게 배출되어 일찍부터 ‘고시 마을’, ‘법조인 마을’ 등으로 불리었다.
 
군산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군(軍) 복무 후 사법고시에 연거푸 실패하면서 좌절에 빠진다. 항로를 잃은 배처럼 떠돌던 그에게 수호천사가 나타난다. 1980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혼례를 올린 것. 아내의 따뜻한 정성으로 1982년 사법시험에서 2차 필기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3차 면접에서 탈락한다. 이유는 대학 시절 유신헌법 철폐, 언론자유 보장, 학원 사찰 금지 등을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여 정학 처분을 받았다는 것.

‘대기만성’,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이듬해(1983)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1985년 군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시민단체와 국제봉사단체에 가입, 자신의 견해와 이상, 소신 등을 언론에 기고한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방송에도 출연, 지역 정가를 비롯해 도정과 시정의 난맥상을 꼼꼼히 지적하며 지방자치제 부활을 강조한다.

1994년 3월 25일 치러진 전북 도의원 보궐선거(군산 제3선거구)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다. 이어 내무 분과위원에 소속된다. 그리고 결산검사위원과 특위 위원으로 선임된다. 당시 도의원 잔여임기는 1년 3개월. 학창시절 민주화운동 경험을 살려 부당한 인권침해와 농촌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 서민 소득증대와 경제복지 실현, 민주화와 평화통일 등에 온 힘을 쏟는다.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면서 소시민이 불이익 받지 않는 따뜻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작은 밀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태 평화재단 후원위원으로 김대중과 인연 시작  

정치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이듬해 본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변호사의 사명인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시민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지방자치제에 부응하는 주인 정신 고취 운동에 동참하면서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운다. 그는 “선배 변호사 권유로 광주고검 전주지부 설치에 선봉장 역할을 맡았던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라고 말한다. 

1994년 봄 아·태 평화재단(이사장 김대중) 후원 위원이 되면서 DJ와 인연을 맺는다. 교류를 통해 DJ의 가치와 철학, 평화통일의 당위성 등을 깨우친다. 그는 “DJ의 민주주의 이념과 철학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라며 “통일은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영토의 재결합이 아니라 민족 화합의 진정한 민족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신 변호사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그는 이리저리 고민이 많다고 푸념하면서도 “평생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온 DJ의 이념과 철학이 절실한 이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특히 사진전은 왜곡된 정보가 전염병처럼 만연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전시 기간도 길게 한 달로 정했다”라고 덧붙인다. 아래는 신 변호사와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휴대폰, 승용차, 컴퓨터 없이 지내는 ‘3무 변호사’

- 스스로 생각할 때 어떠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평하는지? 
1985년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니 올해가 30주년이 된다. 어려서 꿈이 법조인이어서 그런지 변호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남은 삶도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소명을 의식하면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한다.  

- 휴대폰도 없이 사무를 처리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웠다. 하루가 지루하고 답답할 것 같은데?
21세기 지식 정보화시대에 휴대폰 없이 생활하는 변호사는 아마 없을 것이다. 획기적인 통신기기로 사랑받았던 ‘삐삐’(무선호출기)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불편 없이 오늘까지 왔다. 연락망은 유선전화로 가능하고, 이동수단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컴퓨터는 직원의 도움을 받는다. 휴대폰, 승용차, 컴퓨터 없이 지내다 보니 ‘3무 변호사’란 별명까지 얻었다.(웃음)

문명의 혜택을 스스로 저버렸음에도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쉽다. 일정을 조정해야 할 정도로 참여할 모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 군산지부와 DJ 사진전을 준비하는 요즘엔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빨라진 것 같다.(웃음) 휴대폰은 직장을 퇴직하는 6~7년 후 최신식으로 구입할 예정이다.

- 우리는 군사독재를 너무 오래 경험했다. 민주화 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대통령이 통치하던 1960~1980년대는 한마디로 어둠의 시대였다.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긴급조치와 계엄령, 위수령 등으로 헌법 질서는 무시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정의가 상실되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의식 있는 시민과 학생, 정치인, 언론인 목회자들까지 시국선언을 하였고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분노와 좌절, 불신과 냉소가 가득했던 그 시절을 우리 모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행동으로 보여줘 

- (사)행동하는 양심 군산지회를 결성하고, DJ 사진전을 주최한 계기는?
행동하는 양심은 DJ의 정치이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서민경제와 복지,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주된 이념이라 할 수 있다. DJ가 서거하고 이듬해(2010) 3월 26일 국민의 정부 각료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위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단법인 ‘행동하는 양심’을 창립했다. 그 후 지방에서도 지부가 설립됐다. 최근 군산에서도 뜻을 같이하고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지인들이 모여 지부를 결성하고 사진전을 개최하게 됐다.

- DJ를 언제 처음 만났나, 첫인상은?
전북 도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해인 1994년 3월 중순경 처음 만났다. 당시 민주당 후보들이 전북 지역에서 전패하는 등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여서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중앙당 간부들이 지원유세를 펼쳤다. DJ도 격려차 이희호 여사와 함께 내려왔을 때 익산에서 뵙고 대화를 나눴는데 언론을 통해 느꼈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이미지와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겼다.

 

며칠 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고 아·태 평화재단 후원 위원이 되면서 DJ와 가까워졌다. 그의 가치와 철학, 대북정책 등에 더욱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무한한 도전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수양, 독서를 통한 지식 연마 등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두환을 용서하고 박정희 생가를 방문하는 등 DJ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행동으로 보여준 대통령이었다. 

- DJ를 ‘인동초’에 비유하기도 하고, 좌파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DJ는 1950년대 초 정치에 입문해서 거듭된 낙선과 납치, 고문, 암살 위협, 사형 선고, 연금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중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따라서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봄에 꽃을 피우는 ‘인동초’에 비유하는 것은 적합한 표현이다. 그리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DJ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전직 대통령을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 역대 정권에서 교훈 얻어야

-DJ는 국민을 실망시킨 적도 있지만, 업적도 많다.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는?
DJ는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인권, 노동, 복지, 여성복지부 신설, 의료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중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남북 화해협력 정책에 가장 관심이 간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 미래를 내다본 대북 투자를 퍼주기라고 헐뜯는 등 일부 정치인과 국민의 편견과 오해로 인한 아전인수식 주장은 안타까울 뿐이다. 

남북은 상호 적대국으로 인식하면서도 통일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난제가 산처럼 쌓여 있다. 국내 정치상황도 그렇고 주변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온고지신이요,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문제만큼은 역대 정권의 대북정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특히 세계가 주목하고 지지했던 6·15 남북공동선언과 햇볕정책을 연구 발전시켜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계획과 시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행사를 준비하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보다 성숙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는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웃의 불행에 슬퍼하고 노여워할 줄 알아야 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건강하고 따뜻한 선진 사회가 조성된다는 것이다. 우리 회원들도 DJ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시민 여러분의 격려와 관심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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