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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장 빛나는 당신을 위한 꽃’
글 : 배수정 /
2024.04.23 14:38:5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구스타프 클림트, 꽃이 있는 농장 정원(Farm Garden with Flowers), Oil on canvas, 110×110cm, 1906,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빈미술관

 

긴 겨울의 종착점이 보인다. 1월이 되면서 24년이라는 새해로 들어섰지만, 우리의 심리적 새해는 새학기가 시작되고 만물에 꽃이 피어야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는듯하다. 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들, 그리고 꽃봉오리는 그간 움추러든 몸과 마음을 응원해주는 축포와 같은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너무도 유명한 화가이기에 위의 ‘Kiss' 작품만 보아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오늘 선보이는 작품은 닮은듯 닮지않은 그의 또 다른 그림을 소개하려한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고,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였다. 클림트의 집안은 1873년 경제 위기로인해 가계가 기울어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되었다. 

 1876년 14세가 되던 해 그는 ‘빈 응용미술학교’ 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졸업뒤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해 갔다. 1880년대 말경, ‘빈’에는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이 생겼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건축장식미술’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1892년에 이르러 변화의 시기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이였다. 예술가에게 정신적 충격의 요소는 때로는 잔인할 만큼 달콤한 묘약이 되기도 한다. 1895년 가족을 잃은 고통의 터널을 나올때쯤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후 클림트는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클림트는 그가 느껴온 순수와 새로운 패턴의 응용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고, 그 당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늘 무언가 새로운 창의적 세계를 요구하는 예술 세계에도 자신의 기존 틀을 지키려는 보수와 그 틀을 깨려는 진보가 대립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찌하든 클림트는 과거의 습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장을 내놓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Kiss, Gold&Oil on canvas, 180×180cm, 1907~1908,벨베데레 오스트리아 빈미술관

 

그 당시 클림트는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였으나 그곳을 과감히 벗어났고, 1897년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과거 현실에만 안주했던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1900년~1903년에는 ‘빈 대학교’ 대강당 천장에 벽화를 의뢰 받았는데 그는 학교의 천정에 소신껏 누드를 그리게 되었다.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였다.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은 것이다. 

 

이 사건 후로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다시 새로운 탈피를 시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빈 분리파’가 창립 취지에 어긋남을 느끼고는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그런데 이번의 갈등 역시 클림트에게는 지금의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묘약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주도하는 내적 요소는 신비로운 것들과 정신적 내면에 관한 추구였다. 작품 화면은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과 금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였고, 그의 주제에서 빠지지 않았던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는 계속 되었다. 구불구불한선, 장식적으로 반복되는 패턴, 꽃무늬 그리고 인체의 선에서 나타나는 실루엣등 여러 가지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아르 누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을 통과하며 이미 상징주의자로서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열정적이였고,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도 끊이지 않았다. 사후에는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클림트는 마지막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그의 나이 56세되던 1918년, 뇌출혈의 합병증으로인해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꽃이 있는 농장 정원’ 작품은 화면을 가득채운 꽃으로만 이루어진 풍경이다. 그 시대에서 볼 수 없는 

정방형의 형태에 그린것만 보아도 형식의 틀에 구애 받지않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해바라기의 노란잎, 붉은색, 보라색, 흰색등 다양한 색채는 공감감과 입체감 배제된 채로 빼곡하게 꽃으로만 숨막히게 채워져 있고, 클림트의 꽃속 해바라기는 고호와 모네의 해바라가와는 사뭇다른 느낌이다. 그 화가의 인생에 따라서 해바라기도 달리 보이는가보다.

 

‘꽃이 있는 농장 정원’속 꽃과 같이 많은 꿈들을 꾸며 불꽃같이 살았던 클림트. 이 그림은 그의 어느 화려한 그림보다도 클림트와 꼭 닮았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 그 어느곳.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헤메지만, 그의 정신적 반려였던 ‘에밀리 플뢰게’까지도 끝내 곁에 두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의 목마름이 끝이 없었을 것 같은 불안에서였을까.  

어디에선가 들었던 말중에 ‘축하의 순간에 왜 꽃다발을 선물하는가’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유는 ‘그 축하의 순간이 활짝 만개한 꽃처럼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 이 작품을 클림트와 독자에게 선물한다. 저 무리지어 만개한 꽃과 같이 빛나는 오늘이 매일 매일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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