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도심을 벗어나 옥산 당북리로 향한다. 너른 옥산뜰 확 트인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당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당북리를 떠올리면 오래 전 비포장 도로(신작로) 따라 미루나무 아득히 이어지던 풍경이 그려진다. 그 길 따라 흐르던 개울물에는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이 멱을 감으며 붕어, 쏘가리나 가물치 같은 물고기를 잡곤 했다. 그곳에 우뚝 솟은 돛대산 자락 따라 자리 잡은 마을이 백석마을이다. 백석이란 지명은 흰 돌이 많이 났다는 ‘백석산(白石山:돛대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백석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있는 250여 년 된 노거수(팽나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마을을 이룬 백석마을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돛대산(91m)에 오르면 멀리 옥구뜰과 옥산뜰, 회현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들길을 지나 도시를 빠져나가는 차량들의 질주하는 행렬이 발 아래 펼쳐진다.
햇살을 등에 지고 백석제 가는 길,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길을 따라 들녘이 주는 고즈넉함 속으로 달려간다. 바람 끝에 묻어나는 초겨울의 싸늘함 속에서도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볕의 온기가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그 들녘의 끝에 우뚝 솟은 제방 하나가 다가온다. 백석제다.
한때 전북대 병원이 들어선다는 소문과 함께 지역 주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곳이 바로 이 백석제였다. 하지만 그 이름은 들어봤어도 그곳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지만 어떤 관광코스로 사람들이 찾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흰 억새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갈대가 숲을 이룬 백석제는 이전 농업용수를 대던 저수지에서 지금은 완전한 습지로 그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물길을 따라 물속에서 자라나는 왕버들 군락의 모습이 신비한 늪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곳에 멸종위기종 야생 생물인 독미나리와 물고사리 등 513종의 야생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니 보존된 늪의 가치가 더욱 새롭게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와 새하얀 억새꽃이 손을 흔들며 습지를 찾아온 이를 반갑게 맞는 듯 보였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 속으로 찬찬히 백석제의 풍광을 음미하며 걸을 때, 문득 잊고 지냈던 어릴적 맑고 깨끗했던 산하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라보던 마을 풍경이며, 개울물에 멱을 감고 겨울이면 연을 날리던 눈 쌓인 들녘의 아득한 풍경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삶의 추억을 돌아보게 한다.
백석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한 마을이 한림동이다. 한림동은 제주 고씨들이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던 마을로 예전엔 요화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4만여 평 넓이의 백석제 너머, 노란 감이 점점이 박힌 감나무집 마당에서 고요를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길 끝에 자리한 염의서원(숙종 11년 1685년 건립)으로 향했다. 염의서원은 우리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최치원을 비롯한 삼현을 모시는 한림사가 있는 곳이다. 눈부신 백석제의 풍광과 함께 옛 서원의 묵향 가득한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백석산 자락 따라 어디선가 글 읽는 선비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서원을 돌아오는 길, 한림동에서 나서 평생을 살았다는 황 씨 어르신(78세)을 만났다.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백석제 덕분에 물 대기가 편해 연년이 농사를 잘 지었어. 그 덕분에 흉년을 모르고 살았지.”
밭의 풀을 모종삽으로 떠내고 있던 할머니의 밭에는 배추며, 무뿐 아니라 콜라비가 심겨져 있었다.
“예전엔 저 물을 서로 대려고 이웃 마을 사람들하고 다툼도 벌어지곤 했어. 이웃 마을에선 생강을 재배해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습지로 변한 백석제 그 물길이 적시웠을 들녘을 떠올렸다. 옥구(沃溝)란 이름처럼 비옥한 들을 적시는 붓도랑의 물길 따라 곳곳으로 이어진다는 풍요로운 들녘의 풍경이었다. 옥산 물길을 열어주던 백석제가 지금은 창녕 우포늪처럼 생태여행지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병원이 들어선다고 외지 사람들이 땅을 사들였어. 윗마을 쪽엔 땅을 사두고 농사를 짓지 않아 풀들이 웃자란 곳이 있어 보기가 좋지 않아.”
황 씨 할머니는 병원부지로 한때 사람들의 투기 대상이었던 땅으로 인한 후유증을 전해주었다.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온 어르신에게는 병원부지 선정 문제로 인한 열풍이 빠져나간 일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 땅을 일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백석제를 찾은 일행을 만났다. 처음으로 백석제에 왔다는 유동이 씨(53세)는 “군산에 이십여 년 넘게 살았지만 이렇게 잘 보존된 습지는 처음 본다”며 와 보길 잘했다고 전했다. 함께 온 고석경(68세) 씨는 백석제를 지나 염의서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서원에서 성현께 분향을 올리러 와요. 올 때마다 백석제를 지나는데 풍경이 하도 좋아서 별천지에 온 것 같고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기분이에요.”
백석제 둑방에 서서 백석제를 바라보았다. 백석이란 이름 때문이었을까, 백석이란 시인의 시 하나를 떠올렸다. 갈숲 속에서 갈새가 춤을 추고 물닭이 논두렁을 따라 돌아오는 갈숲을 노래한 시였다. 그 시는 보름달이 뜬 밤에 백석제를 다시 보고 싶은 신비한 시의 여운을 전해주었다. 백석의 시 <늙은 갈대의 독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보름밤이면
길거이(게)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
이 몸의 매듭매듭
잃어진 사랑의 허물자국
별 많은 어느 밤 강을 날아간 강다릿 배의 갈대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팡이
모두 내 사랑이었다
초겨울로 들어서는 계절, 백석의 시를 읊조리며 겨울 햇살 아래 백석제 그 신비한 갈숲 습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 깊이 담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