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이현웅의 “음악 이야기”
- 그 곳에 가면 진짜DJ와 진짜 음악이 있다. -
<프롤로그>
지곡동 549-2번지에 가면 카페 ‘음악이야기’가 있다. 그곳에는 '비틀즈'가 있고 '멜로디 가르도'가 있으며 '짙은'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인디 가수도 있다. 여러 단골들도 있으며, 언제나 혼자 와서 독한 칵테일을 마시는 '고독맨', 신청곡이 나올 때 펑펑 우는 '슬픈 남자'도 있다. 술값이 비싸다 하면서도 발길을 끊지 못하는 '투덜이 아저씨'도 있고 그룹 퀸의 음악을 좋아해서 우리끼리 '퀸'으로 통하는 손님도 있다. 이 연재는 카페 주인과 손님들의 이야기이다.
01. 그 겨울의 노래
“DJ는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된 거예요?”
테이블 위를 비추는 주황색 조명의 산광을 헤치고 그의 음성이 다가왔다. 종종 듣는 물음인데도 어김없이 주춤거렸고 가슴에서는 통증이 일었다. 내 나이 이미 쉰을 훌쩍 넘어 미문(美文)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지만 그 겨울을 회상할라치면 여지없이 절제의 힘을 잃고 만다.
열대여섯 살 무렵, 나는 꽃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곁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한 소녀 때문이었다. 심장은 강렬히 뛰었고 세상은 유쾌했다.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상상의 세계가 나를 가뒀다. 그때껏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겨울, 어느 눈보라 치던 깊은 밤에 그 사랑은 정지되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부터 들판을 가로지른 곳에 누워있던 산자락 아래 그녀의 집 앞에서였다.
“우리, 그만해.”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마른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내 심장엔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휘파람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매달렸다. 그 아이를 잃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애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매달릴수록 더 굳어져갔다. 애원과 뿌리침이 계속되었다.
집에 들어가 어른들에게 귀가를 알린 뒤 몰래 다시 나오겠다는 제안에 그 애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갈기갈기 종이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칼바람과 거친 눈발을 그대로 맞은 채 몇 시간을 기다렸다. 바람에 의해 대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은 요동쳤고 이내 절망하고 마는 순간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하늘을 휘감아 도는 바람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눈보라가 밀려왔다. 눈바람은 나를 할퀴고 지나서는 어둠에 잡혀 먹힌 용화산 자락에 부딪히며 음울한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 때문인지 아님 내 인기척 때문인지 그녀의 집 마당에서는 큰 개가 컹컹 짖어댔다.
발부터 얼기 시작한 몸은 어느 순간부터 비현실적인 세계에 들어간 느낌처럼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최면과도 같은 상황에서 나를 깨운 것은 이전과는 다른 대문 소리였다. 끼이익. 단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 누군가에 의해 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였다. 내게 가까울수록 그 애의 걸음걸이가 빨라짐을 느꼈다. 다짜고짜 내게 달려들어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며 독설을 쏟아냈다.
“미쳤구나 미쳤어. 미쳤어. 지금이,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아직도……. 멍충이, 미련 곰탱이. 내가,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너 때문에 …….”
울고 있었다. 대패로 살얼음을 갈아도 그보다는 날카롭지 않을 것 같던 칼바람에도 참아내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을 에는 듯한 맹렬한 추위보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나를 무너뜨렸다.
“너, 나 믿어?”
앞뒤 없는 물음이었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믿는다고 말했다.
“그럼 가. 가서 공부 열심히 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는 그녀에게 매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몸속에서조차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너는, DJ를 하면 잘할 거야!”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내지르던 산자락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 애의 외침에 가까운 소리가 구멍 난 심장에 박혀왔다. 걸음을 멈추어 돌아섰다.
“넌, DJ를 하면 잘할 거야. 내 말 잊지 마.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거 잊지 마.”
그녀가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문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앞산의 왕소나무는 밤새 울어댔고 나도 이불속에서 밤새 울었다.
그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처음 며칠은 방안에 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의식의 상태를 소망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 것은 그 해 겨울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여전히 그 마지막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시내 서점에서 DJ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단숨에 읽었다. 처음엔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단지 DJ의 세계가 어떤 곳인 지나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DJ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나는 미친 듯이 팝 음악에 빠졌다. 재 너머에 살던 동무네 집 전축은 내 전유물이 되었다. 스콜피언즈(Scorpions), 딥 퍼플(Deep Purple), 레인보우(Rainbow), 도어즈(Doors), 크림(Cream)……. 고 3이 되었지만 수험생으로서의 삶은 조금도 없었다. 무익한 어른의 습성을 흉내 내며 그것이 그녀가 원한 삶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일종의 복수심처럼 나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DJ를 하면 잘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날이 갈수록 뇌리에서 더 명료해져 갔다.
라디오 음악방송을 듣고 팝 음악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그나마 나를 평균치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데려다주었다. 김광한, 이종환, 박원웅, 황인용을 매일매일 들었고 잠자는 시간까지 할애하여 그들을 흉내 내는 일에 힘과 정신을 쏟았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곡절 끝에 나는 음악다방의 DJ가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에서 LP 레코드가 가장 많은 음악실에서의 DJ 생활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뒤로한 채 객지로 떠난 형과 누나들을 대신하여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결심은 무너졌다. 작가가 되어 가문의 영화(榮華)와 장려한 낙일(落日)을 기록한 책을 세상에 내놓겠다던 야망도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녀를 믿는다던 내 말은 의미를 잃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던 그녀의 마지막 말은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음악다방의 얼치기 DJ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담긴 진심을 알지 못한 채......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저한테 DJ를 하면 잘할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DJ를 하게 됐어요."
카페 스피커에서는 남성 듀오 [둘다섯]이 부르는 <먼 훗날>이 흘러나온다. 그 어느 한 때, 그녀가 내게 자주 불러주던 노래였다.
- 다음 호에 계속 -
카페 ‘음악이야기’
군산시 신지길 66(지곡동 549-2)
대표DJ 이현웅(010-4104-7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