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 근대문화유산의 도시 군산, 비판의 눈으로 역사인식 계기 삼아야
- 일제 강점의 잔재를 볼 것인가, 수탈 극복의 근세사의 아픔을 볼 것인가.
- 개혁․진보 성향의 문화예술인들 지역 정서 벗어난 군산행
골목길이 어디 편하랴만 군산의 골목길은 유난히 좁고 울퉁불퉁 거린다. 근세사의 굴곡진 삶을 간직한 곳이라서 그럴까. 일본풍(?)의 건물들과 국적 불명의 묘한 분위기가 옛 도심지에 남아 있다. 이걸 자랑스런 근대문화로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극복해야할 문화유산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걷다보면 때론 혼란스럽다.
찾는 이 없던 군산의 옛 도심지 골목길, 그 길 위에 나는 서 있다. 번창했던 기억만 남은 건물주변이 근대의 이름으로 다시 복원되고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골목마다 애환이 서린 군산 구도심. 일제 강점기엔 부두 노동자와 가족들의 눈물과 한숨이 여기 허름한 골목 모퉁이마다 배어 있었다. 그 중심이 근대역사지구이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뭇사람들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만들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으려고 할까.
어께를 같이하고 있는 영화동 일대는 해방 이후 암울한 시기 미군들에게 우리 여인네들이 웃음을 팔았던 곳이다. 이글스크럽 스톡크럽 등등 화려했던 지난밤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것같은 영화동 거리. 이 골목엔 큰 덩치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양공주, 혹은 양색씨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던 우리네 누이들이 있었다. 누가 댄서의 순정이라 했는가. 영화동 거리는 절박했던 삶의 현장이었을 뿐이다.
지금도 그 흔적을 갈매기 깃털만큼 남겨놓고 있는 영화동, 그 길을 건너면 일본인들이 거주했거나 통치를 위해 필요했던 기관들이 널려있었던 월명동, 그 길을 넘으면 개복동이다. 영화동의 네온싸인 화려했던 거리, 얼기설기 얽힌 전깃줄이 혼돈의 세월을 말해준다.
빙빙 돌아 신창동, 월명동 근대의 거리에 섰다. 불금이 되면 여기를 찾는 이들로 소란스럽다. 그 거리로 바깥사람들을 더 불러들이려고 요즘 한창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근대소설마을도 그렇고 근대역사지구 사업도 그렇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포장은 했지만 일제강점 기간의 피눈물 나는 삶의 현장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 개혁․진보 문화예술인들의 기지개, 그리고 향토색 강한 군산의 문화예술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가던 일제 강점기 쌀 수탈의 현장인 항구 뜬다리 부두 앞에 섰다. 군산사람들도 자주 찾지 않는 곳이다. 밀물과 썰물 때 바닷물의 높이에 따라 올라오고 내려가는 배를 대는 자리. 586세대들이 사회책에서나 접했던 현장이다. 이 항구에서 대야 큰 들과 만금평야에서 난 쌀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런 군산의 아픔이 몇 년 전부터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일본풍의 도심을 간직하고 있는 게 어디 군산뿐이랴만 호들갑이 예삿일이 아니다. 일본풍의 잔재가 훨씬 많은 곳으로 치자면 진해나 목포가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게 없다. 필자가 호들갑이라 낮춰 부르는 이유는 극복해야 했던 일제의 잔재들이나 정신문화 등이 아무런 비판 없이 군산 속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아는지 모르는지 군산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던 문화예술인들의 발길 또한 잦아지고 있다. 어쩌면 감춰야할 치부를 들내 놓는 지금, 그들의 눈은 혹시라도 보이는 것만 보지 않을까. 그런 비판에서 몇 걸음 비켜 서 있던 분들이 종종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등장하곤 한다. 보수주의자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득세할 때 진보적인 문화예술은 바닥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발길이 잦아진 분들을 보니 시대가 바뀌니 은근슬쩍 건드려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보와 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단체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일 또한 비슷하다고 본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해서 바닥을 기었던 그런 단체들이 부활할 수 있을까. 필자 또한 10여년 전 그런 단체의 한 축을 맡았던 일이 있으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통렬한 반성이 먼저여야 한다고 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채만식의 ‘탁류’에서 표현했던 썰물이 온갖 시름을 부둥켜안고 내려가는 잿빛 금강하구를 바라본다. 군산이 혼란기를 겪고 있다고 하지만 진영 논리로 예술이 퇴보와 부흥을 반복한다면 그 피해는 누가 보게 될까 생각한다. 발끝에 툭툭 걸리는 게 비단 긴 세월을 지키다 떨어져나간 항구의 콘크리트 부스러기만은 아니다.
근대라는 이름이 여과없이 입에 오르내리고, 정치 지형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걸 진보 예술인 부활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군산이 그렇게 만만한 동네는 아닐 것인데, 흙탕물같은 밀당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금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근대문화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일제 잔재가 때론 미화되기도 하는 게 월명동, 신창동 거리이다. 가끔씩 눈에 걸리는 일본식 풍의 창문을 단 건물과 집을 본다. 건물은 왜색풍이지만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외형들이 눈에 거슬린다. 뼈에 사무친 잔재와 아픈 역사가 아련하다.
문화예술인들의 군산행은 반길 일이다. 그들의 행로는 필요하니 하겠지만 혹시라도 이 지역 문화 예술계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골목을 걷는 내내 그런 인사들로 인해 군산사람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했다. 걱정은 기우라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건 진보와 개혁이 갈 길이 아니다.
◆ 비판의 눈이 필요한 군산근대문화유산
-‘일제 잔재 청산 운동, 옳은 일이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 필요
길을 바꿔 군산사람들과 영원한 동행인 월명공원으로 들어섰다. 1990년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당시 국립박물관으로 활용되었던 옛 중앙청 건물도 철거 되었다.
이게 옳은 일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명산동 동국사에서 월명산 오르는 입구, 예전에 삼일공원으로 부르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월명공원에 남아 있던 일재의 잔재물을 철거하기 위해 시민운동이 벌어졌던 장소이다.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들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비판 세력은 마치 부도덕한 부류로 취급되었다. 역사바로세우기에 편승한 일부 세력에 의해 일제 침탈과 강점의 증거들이 일사천리로 철거되었다. 그 사실은 마치 독립운동 하듯 미화되었다.
농장과 정미소를 경영하며 군․옥 농민을 수탈했던 일본인 모리구끼(森菊五郞)가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보국탑이 있던 곳에 다다랐다. 이 자리를 맴돌면서 월명공원 일제잔재 철거에 앞장서면서 중요 문화예술계 인사로 행세했던 인사들을 생각해본다. 그 흉흉한 시기에 진보와 개혁적인 문화예술계 사람들은 무얼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1995년 5월 1일의 일재잔재철거 개막식에 이어 한 달여 동안 지금 오르는 월명산의 보국탑을 비롯한 성사당, 자우혜민비, 개항35주년기념탑 등 일제의 침탈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철거되었다. 역사적 가치 주장이 제기되자 철거 후 일제의 만행을 전시하자고 합의했다. 2012년부터 15점의 석조 부스러기들만 근대역사박물관 한편에 초라하게 남겨져 있을 뿐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근대문화를 내세우는 오늘에 이걸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월명산에 서서 백화양조와 군산여고를 내려 보며 왜 그랬을까 몇 번을 생각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인식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누군가에게 항변하면서 지역을 지켜 왔던 고인이 된 한 시인을 생각했다.
그들이 앞 장서 막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갔던 그 날의 ‘눈에 보이는 걸 없애면 마음속에서도 지워질 것’이라 여긴 듯했던 파괴적인 행동과 생각의 당위성에 차마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필자를 비롯해서 문화예술인이라고 한다면, 일제 잔재물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졌던 반역사적 행위를 비판하지 않은데 대해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날의 시간들이 월명산 나무가 자라듯이 흐르고 흘러 근대역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의미 부여와 바라보기가 생겼다. 철거했던 일제강점의 증거들은 숱한 사람들 사이에 너무 외롭다. 지금처럼 근대역사 박물관 한편에 조각조각 남아 그들의 흔적만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라면 복원은 아니더라도 그 당시의 사진 자료나 행위들에 대해 실상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섣부른 판단과 시류에 따랐던 일부 역사 연구 단체들과 인사들이 앞장서 파괴한 이런 행동에 대해 어떤 방식이든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단체와 사람들이 군산 문화예술의 주류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군산은 골목도 골목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고 높다.
◆ 근대역사, 그리고 진보 계혁적인 예술인들의 발빠른 군산행
-지역 문화예술이 가야할 길, 그것은 향토색
월명산 수시탑을 지나 지금은 철거된 해망동 산동네에 섰다. 여름에 큰 소리쳤던(바람이 많았기에) 해망동 사람들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이 해망동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내려와 정착한 마을이었다. 피난민촌은 군산 여러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외부 사람들로부터 ‘군산은 뿌리가 없는 고장’으로 혹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간직한 씨족 사회가 옛 옥구 지역에 지금도 건재하다는 걸 감안하면 뿌리론은 잠시 접어두면 좋겠다.
왜 하필 뿌리론이냐 하면, 일부 문화예술인들의 군산을 내려 보는 듯한 역사인식 때문이다. 근대도시로의 항도 군산은 개항과 함께한다. 1999년의 개항 100주년을 맞은 후로 18년이 지났다. 그런데 일부 문화예술인들은 군산시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것처럼 보는 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군산의 뿌리는 옥구이며, 옥구군이 1997년 군산시로 통합된 이후 불과 20년이 지났다. 도시의 이름은 달라졌지만, 이 지역은 삼한시대 등 역사 이래 호남 서북단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군산이 고향인 출향인들 중에서 문화·예술인들의 귀향도 잦아지고 있다. 시대상의 변화, 혹은 자리를 잡기 위한 새로운 물결로 이해한다. 하지만 군산은 문화예술이 크게 부흥되었던 곳은 아니지만 뿌리는 올곧게 간직해 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던 시기인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는 상당한 진통도 있었지만 개혁적인 생각과 진보적인 성향을 띈 예술가들의 활동도 눈이 띄었다. ‘레지던시’라는 이름의 예술적 행위들도 많아졌고, 신진 예술가들의 프로젝트도 종종 벌어졌다. 물론 나름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지역에서는 불만이 많았다. 본인들의 예술적 행위이자 성과라고 하는 데 할 말은 없지만, 그들은 여기에 무엇을 남겼을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진보적, 개혁적인 예술인들 위주로 공공미술사업이 벌어졌던 걸 기억한다. 해망동 998번지 일대, 필자가 밟고 서 있는 이 자리에서 2000년대 초 ‘천야해일(天夜海日)’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가 벌어졌다.
이 지역 글쟁이 시 몇 편을 골목이나 계단에 써 놓거나, 해망동의 철거되는 집 모양을 어느 집 방 한 칸에 만들기도 했다. 철거된 집 생활의 잡동사니들을 모아 놓거나 그물을 이용해 햇빛 가리개를 만들었고, 빨랫줄에 매단 런닝구에 ‘안아줘’라고 써 넣었다. 사람이 사라져버린 폐가, 그리고 오가는 골목길에 잡초며 이름 모를 들꽃을 보물찾기 하듯 새겨놓기도 했다.
참여한 작가들은 힘들었겠지만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프로젝트 기획자와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게 공공 미술이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스러져 가는 게 이번 기획의 의도”라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여년 전에 벌어진 일들이 어제처럼 또렷하다.
해망동을 내려와 째보선창 쪽으로 발길을 잡는다. 언청이 입처럼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해망동 공공미술 몇 년 후 이 선창에서 비슷한 사업이 벌어졌다. 잊혀져가고 몰락해 버린 어판장을 이용해 만장이나 다른 예술적 행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려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최소한 기획했던 방향대로 그렇게 되었을까. 혹시 어판장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이런 게 바로 진보, 혹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예술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군산 땅에서의 예술적 폭력이라고 본다.
◆ 화려함 속에 감춰진 군산의 눈물, 개복동
- 유행처럼 좇지 말고 진정으로 다가서라
째보선창을 지나 화려했던 추억의 골목, 개복동에 들어섰다. 여기가 1990년대까지 군산의 중심이었다. 개복동은 10여년 전 예술인의 거리로 만들려다가 실패한 곳이다. 지금도 이 개복동 골목을 부활시키려는 여러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고은 시인이 청년기에 문학의 열정을 불태웠던 비둘기 다방 자리도 건재하다. 국도극장, 군산극장으로 기억되는 극장 골목은 그 시절을 추억하듯 옛 영화만 간직한 채 서 있다. 개복동이 그렇듯, 지역 문화와 지역 예술은 나름의 특색이 있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행위자나 대상 또한 지역적이어야 하며, 부족한 부분이 생길 때 이 부분만 다른 곳에서 채워나가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일부 출향 인사나 진보적인 성향의 문화 예술인들 중에서 개인의 능력차나 예술적 성취도 등에서 우월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오면 뭔가 획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해는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과 동화되려면 지역을 이해하고 지역의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태생적으로 배타적인 소도시에서 혼자 잘났다간 잘못하면 자칫 ‘모난 돌 정 맞는다’ 는 말처럼 되기 십상이다. 전주가 도청 소재지이고, 전북권 문화예술의 중심 역할을 한다고 해서 다른 지역을 하수보듯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문화와 예술이 계급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일부는 이런 고정관념에 꽉 짜여 있는 듯하다.
최근 군산의 한 문화단체의 모임에서 “전주 등 외지의 능력 있는 문화예술가. 혹은 기획자들을 초빙해서 군산의 문화 예술계를 이끌어줘야 한다.”는 예기가 오갔다. 필요한 말이고, 할 만하니 했겠지만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출중한 능력을 가진 분들의 소신에 찬 주장이겠지만 군산사람의 입맛은 쓰다채명룡님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