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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화가 이중섭이 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김봉하 이중섭미술관 해설사가 전하는 화가 이중섭의 삶
글 : 조종안 /
2017.06.01 11:09:2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화가 이중섭이 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김봉하 이중섭미술관 해설사가 전하는 화가 이중섭의 삶

 

 


 

 

삼다삼무(三多三無)의 섬 제주특별자치도(아래 제주도)에 다녀왔다. 숙소는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위미항) 해변에 잡았다. 이튿날 아침에는 육지의 유채꽃과 수평선 너머로 납작 엎드린 섬, 지귀도를 조망하며 올레길을 따라 산책했다. 지귀도는 주민들이 농사와 어업을 하면서 살았으나 4.3 항쟁 이후 무인도가 됐단다.

 

제주도에서 만난 '남원'이란 지명은 고향친구처럼 반가웠다. 침샘을 자극하는 메뉴에 끌려 들어간 '전복뚝배기' 전문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전북 남원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여서 생겨난 것 같다"며 활짝 웃는다. 아주머니 이야기가 근거 있는지는 뒤로하고 거리의 이정표를 보니 전북 남원(南原)'근원 '을 쓰는데 제주도 남원(南元)'으뜸 '을 썼다.

 

아름다움과 아픔이 공존하는 제주도

 

제주도는 예로부터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 해서 삼무도로 불렸다. 처음 방문은 19822, 그 후 갈 때마다 경관이 낯설고 이국적이어서 더 좋고 새롭게 느껴지는 섬이었다. 그런데 개발이 너무 많이 이뤄져 정낭(집 입구 양쪽 돌기둥에 걸쳐 놓은 나무) 보기도 어려웠다. 전통시장에서도 소박하고 질퍽한 사투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삼국시대 '탐라국'이었던 제주도. 그래서 그런지 육지와는 뚜렷이 다른 역사와 문화가 전해진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1950m)을 비롯해 하늘이 반사되는 쪽빛 바다, 검은 현무암 해안, 폭포, 돌담, 돌하르방, 유채꽃 등 자연 풍광도 뛰어나다. 행정구역상 가장 작은 도()이자 가장 큰 도()이면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갯벌과 논이 없는 것도 이 섬의 특징이라 하겠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에는 신혼여행의 보금자리로, 아름다운 환상의 섬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과 원망, 아픔이 서린 섬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험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일제의 수탈과 착취, ·군정 치하에서 일어난 4·3항쟁 역사는 주민들에게 남다른 결속력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아주 먼 변방임에도 이곳을 거쳐 간 문화, 예술인도 많다. 피난 시절, 이별의 아픔을 그린 가곡 <떠나가는 배>(양중해 작사, 변 훈 작곡)가 제주에서 만들어졌다. 소설가 계용묵은 양담배 노점상을 하며 <흑산호>(제주도 첫 문학동인지)를 창간하였고, 화가 이중섭은 초가 단칸방에서 바닷가 게와 뒤엉켜 노는 아이들 그림을 그리며 소박한 행복을 누렸다고 전한다.

 

고은 시인 "이중섭은 흠모의 대상이 됐던 인물"

 

"그는(이중섭은) 판잣집 골방에 시루에 끼어서도 (그림을) 그렸고, 부두에서 날품을 팔다가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또는 담뱃갑 은지(銀紙)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과 송곳으로도 그렸고, 먹을 것과 잘 곳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떠돌면서도 그렸다···."

 

구상(具常) 시인이 19802월 어느 신문에 밝힌 회고다. 이중섭과 구상 시인은 고향 친구로 알려진다. 구상 시인은 "그를(이중섭을) 너무나 잘 아는 나보고 말하라면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왜냐면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이어서 생존의 목적이나 수단은 오직 그림뿐이었고,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도 오직 그림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고은 시인은 1973년 펴낸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와 한자투성이의 초판을 대폭 손질해 1999년에 내놓은 <화가 이중섭>(민음사)을 통해 "이중섭은 한국 화단의 어느 유파(流波)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회화(繪畫)의 한 정점을 구현한 화가였다""이중섭은 화가 지망생이었던 나에게 흠모의 대상이 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 시대의 신화를 만들어낸 화가였다"고 평한다.

 


 

 

불같은 예술혼 담긴 '이중섭 거리'

 

제주도 서귀포시는 1997년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를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방했다. 특별전도 개최했다. 그의 불같은 예술혼이 담긴 '이중섭 거리'도 조성했다. 2002년에는 '이중섭 전시관(미술관)'도 개관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 머문 기간은 고작 11개월 남짓(19511~12). 그런데도 주변 상가 간판과 하수도 맨홀 뚜껑 등에 '이중섭 문화의 거리' 이니셜이 새겨져 있어 놀라웠다.

 

이중섭이 가족(아내와 아들 둘)과 함께 살았던 초가는 아담하고 고즈넉했다. 위치도 청잣빛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살림 공간은 콧구멍만한 방(1.4)과 부엌(1.9). 이토록 좁은 공간에서 네 식구 지내기가 가능했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식량도 배급으로는 연명할 수 없어 쑥을 캐거나 깅이()와 고구마를 삶아 먹었다고 한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만난 김봉하 해설사는 "당시 가족은 아내 이남덕(李南德) 장남 태현, 차남 태성 등 네 식구였다. 아내 이남덕의 일본 이름은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였다"면서 주로 소()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이 집 주인 부부의 부탁을 선뜻 받아들여 초상화를 그려준 사연과 그의 작품에 유달리 게 그림이 많았던 이유 등을 들려줬다.

 

"이중섭은 서귀포 피난 시절 바닷가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 미안한 마음에 게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그려 달라'고 해도 미룰 정도로 일반 초상화 그리기를 싫어했는데, 방을 내준 집주인에게는 선뜻 그려줬다고 합니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기꺼이 붓을 들었던 것이지요.

 

이중섭이 어린아이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는 유아기(1946)에 디프테리아로 죽은 큰아들을 잊지 못하는 그리움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전시실) 저쪽에 걸린 이중섭 자화상 역시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의미로 그렸다고 하더군요. 작품집, 평전, 언론보도 등에 주로 사용되는 사진은 담뱃불 붙이는 모습을 허종배 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중섭은 화가이면서 글쓰기에도 소질이 뛰어났다고 전해지죠."

 

자신의 대표작 <황소>만큼이나 역동적이었던 작품 활동

 

김 해설사 설명에 따르면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과를 주면 그림을 그리고 먹었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단다. 그는 1907년 남강 이승훈 선생이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오산고보에 들어가 임용련(任用璉) 도화(미술) 교사에게 지도받는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미술학교(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사랑에 빠진다. 광복되던 해(1945) 마사코가 대한해협을 건너와 이남덕(李南德)으로 개명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남덕'의 의미는 '이 많은 남쪽 여인'이라는 뜻이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12월 가족(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유엔군 수송선을 타고 피난, 부산을 거쳐 서귀포에 정착한다. 그리고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 보석 같은 작품들을 남긴다. 거주지를 다시 부산으로 옮긴 후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던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서 달래다가 19569월 청량리 적십자병원에서 고난으로 점철된 생을 마감한다. 그해 그의 나이 마흔하나.

 

오산학교 동창 도움으로 부산 범일동 판잣집에서 제2의 피난 생활을 시작했던 이중섭. 그는 동료 예술가들과 어울려 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음악이 흐르는 다방 구석에 앉아 삽화를 그렸고, 담뱃갑 속 은박지를 모아 볼펜으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다. 파인 곳은 '세피아'(sepia)로 채색했다. 그렇게 피난지 다방에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그림에 몰두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배고픔을 견뎌냈으리라 추정해본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고향에 부모·형제를 두고 떠나왔음에도 그림만을 사랑했고, 그림 때문에 고뇌했고, 그림을 그릴 수 없음에 가슴을 치다가 마흔한 살에 생을 마감한 천재 화가 이중섭. 그의 한평생은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그럼에도 피난 시절 작품 활동은 자신의 대표작인 황소 그림만큼이나 역동적이었다. 은박지에 그린 소품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따뜻하고 참된 인간의 심성(心性)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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