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분 주식회사 설립자 이용구 회장, 그의 발자취 (2)
한국전쟁(1950~1953) 이후 한국은 원조경제 시대로 진입한다.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사람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그리고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포대의 그림은 우정과 신뢰를 상징해서 '악수표 밀가루'란 이름으로 시중에 나돌았다.
미국이 국내 농산물 가격 유지와 저개발국 식량부족 완화를 위해 보내준 악수표 밀가루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암거래가 성행하였다. 배급소와 종교단체 등에는 밀가루를 배급받으려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지금이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가 별식이지만 당시에는 절대적인 식량이었던 것. 김혁종(76) 전 동아원 그룹 이사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때는 미국에서 원조해준 '악수표 밀가루'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지. 6·25전쟁으로 대부분 생산 시절이 파괴되어 거리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났지.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가 완제품(밀가루)을 주지 말고 밀로 주든지 공장을 지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던 거야. 일자리 창출과 경제 발전 등을 고려해서 그렇게 요구했던 것이지. 국가에서 보증만 서주면 외국 자금을 들여와 공장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보릿고개 시절(1950~1960년대).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 군산에 밀가루와 사료 대리점이 유달리 많았고, 짜장면·짬뽕 전문 중국음식점을 비롯해 국수공장, 과자공장, 제과점, 찐빵가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호남제분에서 생산되는 상품(밀가루, 사료 등)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호남제분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제분 회사였다. 1957년 하루 생산능력은 130톤. 1963년에는 공장을 증설한다. 1966년 당시 생산품은 밀가루, 정미(精米), 정맥(精麥) 등이었다. 그중 밀가루는 태양표(1등급) 등대표(2등급) 등을 하루에 6000포대(22kg) 생산하였다. 직원은 생산직 포함해서 700여 명. 기계시설도 우수했다. 점포망도 전국 주요 도시에 구축하고 있었다. 그 후 제일사료, 한국산업(정미소) 등을 잇달아 설립한다.
정부 요청으로 공장과 본사 목포로 이전
1967년, 그해 전라남도 목포는 제7대 총선의 최대 격전지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여당) 후보 첫 지원 유세를 목포에서 가질 정도였다. 유세에서 정국 안정을 역설했던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여당 후보 10명이나 20명이 떨어져도 야당 후보 김대중을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관계 장관들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목포 개발'이라는 주제로 국무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다양한 장밋빛 공약을 쏟아낸다. 그 속에는 삼학도(국유지) 관리권 목포 이관과 함께 제분공장 설립도 들어있었다. 목포 시내에는 천문학적인 현금과 밀가루가 뿌려졌다. '막걸리로 홍수를 이루고 국수로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손꼽히는 향토기업으로 군산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던 호남제분은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1971년 공장을 목포로 이전하면서 밀가루 생산이 중단된다. 이때 회사는 이용구 회장, 이희섭 사장 체제가 된다. 이희섭 사장은 이 회장의 큰아들로 한국제분공업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 4월에는 호남제분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본사를 목포로 이전한다. 그해 제일사료 공장도 대전으로 옮긴다. 따라서 군산에는 제일산업 사무실만 남는다. 그 배경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는 김혁종 전 동아원그룹 이사가 전하는 당시 상황이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목포에 공항을 만들고, 항구를 정비하고, 조성되는 공업단지에 큰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지. 그 속에 호남제분이 걸려들었던 거여. 기업은 정부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군산 사람들이 호남제분 목포 이전을 빼앗긴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그리고 1968년 당시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군산상고에 야구팀을 만들고, 1971년 전국체전과 1972년 황금사자기를 우승했잖아. 군산에 역전의 명수가 탄생하자 그에 고무되어 한국합판(사장 고판남)은 제일고 축구부를, 백화양조(사장 강정준)는 군산고 농구부를 육성하기로 하지. 호남제분은 군산여상 배구부를 지원하겠다며 배구팀도 만들었는데 본사가 목포로 떠나버린 것이지. 그래서 군산 시민들의 상실감이 더욱 컸을 거야."
공장과 본사를 목포로 옮긴 호남제분은 공장을 증설하여(1일 생산능력 1000톤) 국내 3대 제분업체(대한제분, 동아제분, 호남제분)의 하나로 꼽히는 등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1970년대 말에는 제일사료, 일양피혁, 한국농업, 대상, 유성물산, 전진산업, 제일피혁 등 7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으로 거듭난다.
잘 나가던 이용구 회장은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1980년 3월 증권거래법 위반 및 공갈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다. 호남제분 본사 경리 장부도 압수당한다. 사유는 증권거래소 밖에서 경쟁회사(대한제분과 그 계열회사인 대원제지) 주식을 비싼 값에 대량으로 사들여 경영권을 가로채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회장이 취득한 주식을 매각하고, 그해 4월 대한제분 주주총회가 개최되면서 해결된다.
호남제분 역사, 60년 만에 막 내려
이용구 회장은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1979년 4월 자신의 호(芸山)를 딴 학교법인 운산학원(논산여자상업고등학교)을 고향에 설립하고, 1981년 1월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육영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90년 7월, 전국 시장 공략을 목표로 호남제분을 한국제분으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운산그룹을 출범시킨 이용구 회장은 1993년 4월 일본 게이오 대학 부속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한다. 당시 신문은 이 회장을 충남 논산 출신으로 전진양행, 호남제분, 제일사료 등의 회사를 설립하였고, 한국사료협회 회장을 역임한 신광학원(신광여고) 이사장이라 소개하였다.
운산그룹은 이 회장이 세상을 뜨고 그해 7월 막내아들(이희영)마저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등 불상사가 겹쳐 일어난다. 그때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미국에 머물던 둘째 아들(이희상)이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이희상 회장은 동아제분을 인수하는 등 밀가루를 주력사업으로 사세를 더욱 확장한다.
부친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는 이희상 회장. 그는 2013년 검찰수사(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환수팀)를 받고 환수금 일부를 환수당하기도 하였다. 2015년 초에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 주력 계열사 매각작업을 진행하였고, 2016년 2월 경영권이 사조그룹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1956년 군산 장미동에서 시작된 호남제분 역사는 60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덧붙임: 이용구 회장은 군산시 신흥동(구영 1길)에 위치한 히로쓰가옥(등록문화재 183호) 건물주이기도 했다. 호남제분을 설립한 후 히로쓰가옥을 사들여 관사로 사용했던 것.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룹 경영권이 넘어가기 전 계열사 사옥들을 매각하면서도 히로쓰가옥을 처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용구 회장 손녀(이나경)가 소유주인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