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호남제분 주식회사 설립자 이용구 회장, 그의 발자취 (1)
“25일 사조그룹은 동아원그룹을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줄임) 동아원그룹의 경영권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사조그룹에 지분을 넘긴 이희상 회장은 쓸쓸한 퇴장을 하게 됐다. 동아원그룹은 창업주인 운산 이용구 회장이 1956년 창업한 호남제분이 모태다. 밀가루 제조 판매를 비롯해 사료, 와인, 식품까지 다양한 업종에 진출해 한때 계열사가 30개가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래 줄임)”- 2016년 2월 25일 EBN 뉴스에서
이희상 회장은 이용구 전 운산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그는 1993년 봄 부친이 별세하자 경영일선에 뛰어들어 본사를 서울로 옮기고 2000년 ‘동아제분’을 인수하는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 2010년 9월 현재 밀가루 분야 매출 비중은 58.66%, 사료 분야는 41.34%를 차지하였다. 2012년에는 그룹명을 ‘동아원’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급격한 사세 확장에 따른 차입금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6년 2월 경영권을 사조그룹에 넘겨주게 된다.
‘동아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 기업으로 세간에 더욱 알려졌다. 1995년 이희상 회장 장녀(이윤혜)와 전 전 대통령 셋째아들(전재만)의 결혼으로 사돈 관계가 맺어진 것. 따라서 이 회장은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 은닉재산과 비자금을 파헤칠 때마다 도마 위에 올랐다. 이렇듯 전직 대통령과 사돈지간이 되면서 여론은 금융기관들이 거래를 꺼려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란 의견과 덕을 봤을 것이란 의견 등으로 나뉜다.
오늘은 이용구 회장이 1956년 전북 군산시 장미동(내항 부근)에 설립한 호남제분 역사와 이 회장이 1993년 고인이 되기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위 사진은 호남제분 공장과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군산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170여개 중 유일한 일본식 창고이다. 1934년 제작된 군산부 지도에는 페인트, 철물, 선구(船具) 등을 취급하는 중본상점(中本商店)이라 표기되어 있다. 건물 소유주는 중본상점 주인 중본삼길랑(中本三吉郞). 주소는 군산부 혼마치(本町) 2정목. 지금의 ‘해망로 196’으로 근현대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김성수 ‘해망로 196’ 대표 설명에 따르면 근현대사박물관은 오는 5월 개관 예정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농경시대를 거쳐 20세기가 끝나는 1990년대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도록 꾸며진다. 군산의 다양한 이야기와 진귀한 생활용품도 만날 수 있다. 건물의 특징은 창고를 원형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 이 창고는 군산, 부산, 인천 등에만 형태를 보존하면서 남아있는 일본식 건물로 전해진다.
창고가 지어지는 1930년대 초 군산항에는 부잔교(뜬다리) 3기와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상옥창고 세 동이 들어선다. 1934년에는 쌀 반출이 200만 석을 넘어선다. 내항 철도 주변에는 1만석 이상 생산하는 정미소 14개와 크고 작은 창고 100여 개가 들어선다. 5만석 이상 생산하는 대형정미소도 여섯 개(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등)나 됐다. 이 지역은 광복 후에도 ‘정미소 거리’로 불리었다.
고무신장수 21년 만에 호남제분 설립
특이한 형태의 창고 건물은 광복 후 정부가 적산으로 몰수하여 관리하다가 1956년 창고 주변 3000여 평에 제분회사를 설립한 이용구(李龍九) 회장 소유가 된다. 이 회장은 만월(滿月)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군산 경성고무 전무로 재직하다가 그해 9월 미국에서 원조 식량으로 들어온 소맥을 재료로 밀가루를 생산하는 호남제분을 설립하였다.
이 회장은 군산시 신흥동(구영 1길)에 위치한 히로쓰가옥(등록문화재 183호) 건물주이기도 했다. 호남제분을 설립한 후 히로쓰가옥을 사들여 관사로 사용했던 것.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룹 경영권이 넘어가기 전 계열사 사옥들을 매각하면서도 히로쓰가옥을 처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용구 회장 손녀(이나경)가 소유주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스무 살 때(1935) 경성고무 대리점을 개업하면서 경영자(CEO)의 길로 들어선다. 근면·성실했던 그는 논산-군산 왕복 250리(약 100km)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사업에 몰두한다. 이만수 경성고무 사장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는 1951년 경성고무 전무로 스카우트된다. 아래는 1957년 경성고무 상무로 경영에 참여, 1964년 사장에 취임했던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전언이다.
“이용구는 충남 논산 사람이야. 일제시대에 논산에다 경성고무 대리점을 열어 돈을 많이 벌었지. 6·25동란 전까지는 군소제지에 5일마다 장이 섰잖아. 군산에서 신발(고무신, 운동화 등)을 사다가 장마다 다니면서 팔았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도매상 규모가 커지니까 신발을 더 많이 가져가게 됐단 말이야. 그리고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내 아버지(이만수 사장)에게 신임도 얻었지.
그러던 중 6·25동란이 터졌단 말이야. 그때 아버님은 노령하시고, 큰형은 고려대 교수 생활하다가 어디로 가버렸고(월북), 작은형님은 경찰 간부였잖아. 나는 군대에 있었고 나이도 어렸으니 회사를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구. 그때 아버님이 논산에 있는 이용구를 불러 ‘네가 좀 맡아서 해보라’고 했지. 그래서 1951년 전무로 온 거야. 이용구가 호남제분을 만들고 경성고무를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군산으로 내려간 거지. 그때가 아마 1957년인가···.”
이용구 회장은 1956년 공식적으로 전무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경성고무와의 인연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이용구 회장은 1970년대 초에도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해외 출장을 몇 차례 다녀온다.
1972년,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 수입하는 신발류에 상쇄관세를 부과하기로 정한다. 이에 한국 정부는 상쇄관세 저지를 위한 민관 교섭단체(차관급 1명, 민간기업 대표 6명)를 구성하여 미국에 파견한다. 이때 이용구 회장은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진양화학, 삼화고무, 태화고무 등 다른 기업 대표들과 미국으로 향한다. 그는 1974년 2월과 3월에도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업무 협의차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자료출처: 옛날신문, 기업사전, 사조 동아원그룹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