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군산에 ‘금주통’도 있었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일본식 지명, 정확히 표기해야
일제는 을사늑약(1905) 이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명을 일본식으로 고치거나 새로 만든다. 1914년 10월 전국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순종황제를 이 왕으로, 수도인 한성부를 경성부로 격하시켰다.
경성부가 경기도에 편입되고 도청소재지가 됨으로써 대한제국 수도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일제는 전국의 산과 하천 이름에서도 대한(大韓)을 상징하는 명칭은 모조리 없앴다.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바꾼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1-해방(1945) 당시 군산 시가지 항공사진, 격자형 도로망이 선명하다.
전북 군산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문화와 지명이 대부분 사라졌다. 기우제와 동제(당산제)가 끊기거나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지명도 동(洞), 정(町). 통(通), 정목(丁目) 체제로 바뀐다. 그중 정, 통, 정목은 일본식, 동(개복동, 신흥동 등)은 마을(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1932년 10월 일본식 지명(개복정, 신흥정 등)으로 개칭된다.
대한제국은 1899년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면서 지금의 원도심권을 각국조계지(외국인 공동조계지)로 설정한다. 조계지 제도는 1914년까지 존속됐으나 일제의 전관 거류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시가지는 그들의 계획대로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본 정,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과 이를 가르는 1조통~9조통)으로 조성된다.
정통(町通)은 끝말이 겹치는 일본식 지명
▲사진2-같은 도로임에도 지명을 다르게 적은 사진(명치통, 명치정통)
위는 우연한 기회에 군산의 어느 동사무소(주민 센터) 민원실에 들렀다가 찍은 일제강점기 군산부(府) 거리 사진이다. 일제가 자신들의 치적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엽서 사진을 확대 복사해서 전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설명에 거리 이름만 있을 뿐 언제 찍었는지 시기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오른쪽 위 명치정통 사진에서 1930년 12월 11일 화재로 사라진 군산공회당(상공회의소) 지붕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920년대 중후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된 사진은 모두 14장. 수탈의 아픔이 느껴지는 거리사진 외에 하얀 연기를 숨 가쁘게 뿜어내며 달리는 증기기관차, 한가롭다 못해 쓸쓸하게 느껴지는 번영로(전주-군산 도로), 60~70년대 월명공원 산동네 입구, 아이스케이크 노점상 할아버지 모습 등이 만감을 교차하게 하였다.
‘금주통, 전주통(영화동), 명치통(중앙로 1가), 명치정통, 중앙로, 영동상가, 영정통, 본정통(해망로), 조선은행앞도로, 군산선, 번영로, 금동, 성광교회골목길, 유곽거리(명산동)’
주민 센터에 전시된 사진 제목들이다. 일제에 대한 분노와 아련한 추억이 교차하는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제목과 비교하며 감상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일본식 지명인 정(町)과 통(通)이 겹치거나 일제강점기 존재하지 않았던 도로명이 표기되어 있어서였다. 제목도 일관되지 않아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사진3-부연설명 없이 해방 후 지명과 일제강점기 지명을 함께 적은 ‘영정 1정목’
기자를 의아하게 했던 사진 제목은 ▲ ‘명치통(중앙로 1가)’과 ‘명치정통’ ▲ ‘금주통’과 ‘전주통(영화동)’ ▲ ‘영동상가’와 ‘영정통’ ▲ ‘본정통(해망로)’과 ‘조선은행앞도로’ 등이었다.
명치통과 명치정통 사진의 정확한 표기는 ‘명치정 1정목’과 ‘명치정 2정목’이다. 명치정은 부청을 중심으로 군산공원 방향은 명치정 1정목, 군산경찰서 방향은 명치정 2정목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설명 없이 끝말이 겹치는 지명을 표기해서 헷갈렸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명치통도 있었고, 명치정도 있었고, 명치정통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하였다.
혼마치로 불리었던 본정(本町:지금의 해망로)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근대건축관) 앞 사거리를 경계로 군산세관 방향은 본정 1정목, 째보선창 방향은 본정 2정목이었다. 따라서 본정통 역시 끝말이 겹치는 지명으로 볼 수 있겠다.
혼란스럽기는 금주통과 전주통 역시 마찬가지. 일제강점기 군산에 전주통(全州通)은 있었어도 금주통(金州通)이란 지명은 없었다. 1930년대 일본인 업자가 발행한 홍보엽서에 ‘群山 金州通’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는 엽서 제작자의 착각 아니면 오기(誤記)로 보인다.
영동상가와 영정통 역시 부연 설명 없이 지금의 지명과 옛 지명을 혼용해서 한 장은 해방 후 사진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멀리 보이는 서래산과 주변 건물들로 미루어 시기만 다를 뿐 비슷한 장소(지금의 영동 입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확한 표기는 ‘영정 1정목’이다. 지금의 평화동 거리는 영정 2정목, 대명동 거리는 영정 3정목이었다.
1920년대 엽서사진과 그 이전 기록물에서 본정통, 명치정통, 영정통 등의 지명이 가끔 발견된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군산부 시가지 계획평면도(1940년대)와 일본인이 제작한 군산부 시가지도(1934년 기준)는 본정 1정목, 본정 2정목, 명치정 1정목, 명치정 2정목, 영정 1정목, 영정 2정목, 영정 3정목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가장 많이 쓰였던 지명이기도 하다.
1936년 2월 15일 치 ‘동아일보’를 보면 <통(通)과 동(洞)을 개칭, 정(町)으로 통일>(경성부 확장 소식)이라는 기사 제목이 발견된다. 그 후 신문과 기록물에서 끝말이 겹치는 지명(町通) 표기가 거의 사라진다. 군산의 동사무소 민원실 사진 설명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행정기관의 정확한 정보 제공은 신뢰감을 높이고 방문객과도 더욱 친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